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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의상대사,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다-하

기자명 주수완

중국 통해 인도 불교 골수를 캐어와 신라에 재현

▲ 의상 스님이 신라에 귀국한 해에 찾았던 관음보살의 거주처 양양 낙산사의 동해 바닷가.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배경인 기암괴석의 바닷가와 매우 닮은 지형이 인상적이다. 사진은 이주민 문화재감정관 제공.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인문 혹은 김흠순의 부탁으로 20여년(짧게는 10년일 수도 있다) 만에 신라에 귀국한 의상 스님에게는 당의 신라 침공 준비 사실을 알려야하는 긴급한 임무가 있었다. 정말로 신라는 일개 스님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당의 대규모 군사 움직임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중국의 동태에 어두웠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김인문이 의상에게 전달했던 내용은 단순한 침략준비 사실을 넘어서 정확한 침략의 날짜나 경로, 책임사령관 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의상 스님의 귀국이 스승 지엄의 입적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만약 이런 긴급한 임무가 아니었더라면 지엄의 후계자는 현수 법장이 아니라 의상 스님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름대로는 그 지위까지 포기하고 오른 귀국길이었으리라.

관음보살 상주처 낙산사는
인도 ‘포타락카’ 축약한 것

원효·자장 보살친견 바라도
의상만 유일하게 보살친견

신라 안에서의 보살 친견은
이 땅이 바로 불국토 자부심

보드가야서 깨달은 부처님
부석사에 모습 그대로 모셔

석굴암의 본존불 불상까지
곳곳에 의상 스님 숨결 스며

그러나 막상 나당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의상이었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있어 1등공신은 문두루비법을 구사한 명랑법사였다. 여기서도 의문이 든다. ‘삼국유사’에서는 의상이 전한 당의 침공 예정 소식에 신라 조정이 우왕좌왕하다 명랑법사에게 비책을 부탁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역사상으로 나당전쟁은 670년 3월 신라와 고구려 잔여군이 연합하여 당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만약 의상이 정말로 어떤 정보를 가져왔다면 3월 이전이었을 것이고, 이 선제공격은 그 정보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갑자기 선제공격을 했다기보다는 분명하게 침공준비를 하던 당군에 대한 기습타격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중요한 임무를 마친 의상은 곧바로 강원도 양양, 현재의 낙산사가 자리한 낙가산에 머물고 계시다는 관음보살을 친견하러 떠났다. ‘낙가산’ 혹은 ‘낙산’이란 관음보살이 머무시던 인도의 ‘포탈라카’ 산을 한자음으로 축약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곳에서 7일 동안 재계한 후에 용왕으로부터 수정염주, 여의보주를 받았고, 다시 7일 후에는 관음의 진신을 뵙게 되었는데, 이때 관음의 지시로 대나무가 자란 자리에 금당을 세우니 바로 낙산사이며, 낙산사 홍련암은 의상 스님이 관음보살을 친견한 바닷가 굴 위에 세워진 법당이다.

▲ 부석사 무량수전의 소조불좌상. 석가성도지 보드가야를 상징하는 편단우견 항마촉지인의 불좌상이며, 보드가야에서처럼 동쪽을 향해 정좌한 부처님이다.

한편 이 소식을 듣고 원효 스님도 관음보살을 뵈러 낙산사를 찾았다. 그런데 가는 길에 여인으로 변한 관음이 월수백(생리대)을 빨던 물을 마시라고 건네자 이를 더럽다고 엎질러 버렸는데 그러자 파랑새 한 마리가 “제호(醍?, 일종의 감로수)를 거절한 승려여!” 하고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원효가 관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의상이 원효보다 한 등급 높은 스님이었음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의상 스님은 비록 열심히 목욕재계하셨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테스트도 거치지 않고 관음보살을 만난 반면, 원효 스님은 누구라도 통과하지 못할 테스트, 즉 아낙이 건넨 생리대 빤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음보살이 만나주시길 거부했으니 다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자장율사도 마찬가지이다. 자장율사는 그토록 문수보살을 뵙고 싶어 했으나 문수보살은 중국 산서성 오대산에서부터 강원도 오대산에 이르기까지 약속장소를 여기저기로 옮겨가며 바람만 맞히고는 결국에는 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를 못 알아본 자장을 비웃으며 떠나버린다. 자장율사가 이 걸인에게 못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끝내 자장의 신앙을 짝사랑으로 만들어버린 문수보살님도 다소 너무 하셨다. 이렇듯 자장, 원효, 의상 스님은 신라통일기를 즈음하여 한국 불교의 기초를 닦은 분들이자 모두 문수와 관음 같은 성현을 친견하고자 했지만, 결국 성공한 분은 의상 스님 뿐이다. 나아가 자장율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원효 스님은 다소 뜬금없이 이 보살친견 콘테스트에 어부지리로 끌려나온 느낌마저 든다.

▲ 부석사란 이름의 원인이 된 부석. 공중에 한번 떴다가 내려온 듯한 느낌을 준다. 보드가야에 금강보좌가 있다면 부석사에는 부석이 있다.

어쩌면 자장율사, 원효 스님도 나름대로는 문수보살이나 관음보살을 친견하거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성현을 친견한 어떤 설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워낙에 쟁쟁한 의상 스님의 제자들에 의해 이러한 설화들은 각색되고, 결국 의상 스님이 최후의 승자가 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여하간 이와 같이 신라 안에서 불교의 성현인 보살을 친견한다는 개념은 이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다. 인도에 머물고 계셔야 할 보살들이 신라 땅에도 머문다는 아이디어가 이 땅을 인도와 다름없는 성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경우가 바로 의상 스님이신 셈이다. 이러한 불국토의 믿음은 낙산사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펴져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포탈라카산의 음역이 낙산이라면 그 뜻을 한자로는 ‘백화산’이라고 풀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여러 곳에 존재하는 백화산은 말하자면 모두 관음보살의 거주처로 믿어져 왔던 흔적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의상 스님은 포탈라카산만 신라로 옮겨온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676년에 의상 스님이 세운 부석사는 사실상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당을 옮겨왔다고 볼 수 있다.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돌아앉은 편단우견 차림새의 항마촉지인 불좌상은 바로 석가성도지 보드가야를 상징하는 모습이다. 물론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불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편단우견 항마촉지인’이라는 기본 컨셉은 의상 스님께서 부석사를 창건하실 때 의도했던 형상이라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원래 의상 스님이 현재 부석사 자리에 절을 세우고자 했을 때에는 이교도들이 먼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절을 세울 수 없었다. 이때에 당나라에서부터 의상 스님을 모시는 단월이었던 선묘가 용으로 변하여 거대한 바위를 공중에 띄워 그 자리에 거주하던 이교도들을 겁주어 쫓아내었다는 설화가 ‘송고승전’에 전한다. 그렇게 보면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할 때도 용의 도움을 받았고, 부석사 창건에서도 용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보면 의상 스님은 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셨던 것 같다. 의상 스님이 스스로 신통력을 부렸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렇게 매번 용이 기적을 일으키며 돕는 것도 매우 독특한 면이 있다.

▲ 의상의 지팡이가 자라나 나무가 되었다는 선비화. 부석사의 보리수라 할 수 있는 이 나무를 퇴계 이황은 “지팡이 꼭대기에 조계수가 흐르는가, 천지간의 비와 이슬 없이도 자랐네”라고 칭송했다.

더불어 부석사 조사당 앞에는 선비화라는 꽃나무가 심겨 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나무는 의상 스님이 유학을 떠나기 전 이곳에 꽂아둔 스님의 지팡이에서 뿌리가 생기고 잎이 돋아 나무로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의상은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남기고 떠나신 것 같은데, 이제 스님이 입적하신지 오래인 지금도 이 나무는 푸른 잎을 돋워서 마치 의상 스님의 가르침이 세상에 살아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이러한 용의 협조, 부석이라는 거대한 돌의 등장, 신비한 나무와 유학길의 설화는 어떤 면에서 석가모니께서 수행하신 금강보좌와 이 금강보좌에서 수행할 것을 권한 용의 신 ‘나가(Naga)’, 그리고 금강보좌 위에 드리워진 보리수 등을 연상케 되어 전반적으로 보드가야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보드가야야 말로 ‘화엄경’의 바탕이 되었던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 아닌가. 거기에다 편단우견의 항마촉지인상이라니 그야말로 의상 스님은 인도의 보드가야를 이곳 신라에 옮겨오고자 하셨던 것이다.

일연 스님도 의상 스님의 의도를 분명히 꿰뚫어 보았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의상 스님의 행적을 찬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숲길 헤치고 바다 건너 흙먼지를 지나니 (披榛跨海冒煙塵)
지상사의 문이 열려 이 보배를 맞이했네 (至相門開接瑞珍)
화엄을 통째로 캐어다가 우리땅에 심으니 (采采雜花我故國)
종남산과 태백산이 일시에 봄을 맞이했네 (終南太伯一般春)

첫 행은 의상 스님의 당나라 유학길이 얼마나 힘든 길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 행에 등장하는 지상사는 의상 스님이 찾았던 종남산의 지엄법사가 머물던 사찰이니, 지엄법사가 의상을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였음을 읊은 것이다. 주목할 것은 세 번째 행인데, 여기서의 ‘잡화’는 아마도 의상 스님이 전한 ‘화엄’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 화엄을 ‘채채’, 즉 ‘캐다’의 반복이니 ‘통째로 캐다’ 정도로 번역하면 어떨까? 그렇게 인도와 중국의 성지를 마치 캐어오듯이 신라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앞서 살펴본 관음성지 포탈라카산을 낙산에 옮겨오고, 석가성도지 보드가야를 부석사에 옮겨온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행에 의상 스님이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었음을 한마디로 축약하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 행은 중국의 종남산과 부석사가 있는 태백산이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아마도 더 나아가 인도의 성지와도 동기화, 싱크로화 되어있었음을 찬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의상 스님은 이렇게 인도의 성지를 중국을 통해 캐어옴으로써 우리 땅에 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지닌 불교미술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대표적으로는 의상 스님이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것을 소재로 그려진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와 조선시대 법당 뒷벽의 백의관음도 벽화, 그리고 보드가야를 상징하는 편단우견 촉지인불좌상의 계보를 이은 우리나라 최고의 불상인 석굴암 본존불상에 이르기까지 의상 스님의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듯하다. 설령 의상 스님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나라에 불교미술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상 스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들 불상에 흐르는 피는 이리도 뜨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98호 / 2017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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