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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빈승의 독학-하

“모든 사람은 스승이고 모든 곳은 배움터입니다”

▲ 불광산 개산을 위해 성운 대사와 제자들이 건설공사에 열중하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저에게는 각계 인사들이 자주 찾아오시는데 교직에 있는 선생님은 교육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을 이야기하였고 군인들은 군대의 전쟁에 대한 정황에 대해 말을 했고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시시비비를 말하였습니다. 중국대륙에서 온 그분들은 “이란 지역에 있는 ‘뢰음사’라는 작은 절에서 대화를 나눌만한 스님이 한 명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담론을 나눈 것입니다."

18세가 되던 해는 항일전쟁이 끝날 무렵으로, ‘쟈오산(焦山)불학원’으로 온 저는 독학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매월 출판물을 발행했는데 내용 대부분 제가 손으로 써서 ‘나의 마당’이라고 제목을 정했는데 독자는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내용에는 권두언, 논평, 불학강좌를 포함하여 산문, 소설, 시가(詩歌)와 편집후기까지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 필사하며 연습하다보니 문자의 힘이 깊게 제 마음에 각인되는 인연이었습니다. 이는 제가 나중에 글을 쓰는데 있어서 여러 문체의 글에 대해 감당할 수 있게 된 것과 크게 관련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저에게는 △호적지(胡適之)의 ‘호적문존(胡適文存)’ △양계초(梁?超)의 ‘불학18편(佛學十八篇)’ △왕계동(王季同)의 ‘불학과 과학의 비교(佛學與科學的比較)’ △우지표(?智表)의 ‘불교과학관(佛?科學觀)’ ‘한 과학자의 불교경전에 대한 연구보고(一個科學者?究佛經的報告)’ △월간 ‘해조음(海潮音)’ ‘중류(中流) 등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매번 좋은 내용을 읽게 되면 저는 꼭 노트에 적어 두었습니다. 심지어 루쉰(魯迅), 바진(巴金), 라오서(老舍), 마오둔(茅盾), 선충원(沈從文) 등 당대 문학대가의 작품도 매우 흠모하였습니다. 또한 천헝저(陳衡哲)의 ‘작은 빗방울(小雨點)’, 빙신(?心)의 ‘어린 독자에게(寄小讀者)’ 등등에서도 저는 일부 영향을 받았습니다.

‘쟈오산불학원’에서 수업을 하시는 강사진도 예전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태허 스님 문하의 가장 뛰어난 불학대가인 지봉(芝峯) 스님, 북경대학교 설검원(薛劍園) 교수, ‘구사론’ 강의에 출중한 원담(圓湛) 스님 등이 계셨고 또한 노장(老莊) 철학, 사서삼경 외에도 대수, 기하 등 수업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1~2년 사이에 저는 마치 굶주림과 갈증을 해소하듯이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짧은 글과 시를 써서 진강지역 여러 신문사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저 자신에게 많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쟈오산’에 있으면서 저는 생사를 알 수 없는 부친을 위해 ‘부칠 수 없는 한통의 편지’라는 글을 썼고 ‘평등 아래서의 희생자’와 ‘지폐 여행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비록 빈승이 돈을 써 본적이 없었지만 빈승이 생각을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마치 깨달은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배우게 되든 마음먹은 대로 되었습니다. ‘쟈오산’에서 반년만 있으면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학제가 바뀌게 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저는 졸업식을 포기하였고 저의 편지를 받아보신 은사 스님은 1947년 겨울에 당신의 출가도량인 종찰 대각사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저는 그 지역의 한 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맡게 되었는데 배운 것을 현장에서 응용해 볼 수 있어서 저에게는 ‘실습을 통해서 배우는 시험 장소’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나중에 남경에서 짧은 기간 동안 주지를 하게 되면서 예전 청소년기에 배웠던 총림의 규례를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에 저 자신에게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육해공 삼군같이 저는 율종 보화산(寶華山) 율학원과 선종 진산(金山) 강천사(江天寺), 창저우(常州) 천녕사(天寧寺) 선방, 교종도량 쟈오산(焦山) 정혜사(定慧寺) 불학원 등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비록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했지만 이론과 운용의 원융을 다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현재 빈승이 계단의 계사를 맡을 수 있었고 불광산에서 거행한 여러 번의 수계산림에서 일부 규례에 대해 개진할 수 있었으니 이는 당시 각 종파에서 배우면서 기초를 닦았던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남경에서는 단지 1년여 짧은 기간을 머무르면서 저는 도반들과 화장사(華藏寺)에서 ‘불교 신생활 운동’을 펼쳤습니다. 백탑사에서 ‘노도(怒濤)’라는 잡지를 발행했던 경험으로 구태의연했던 당시의 불교혁신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불교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자 했습니다. 이 역시 저에게는 사상적인 개척과정이 되었으며 제가 홍법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가장 큰 공덕이 되었습니다.

대만으로 건너온 이후 비록 빈승이 무슨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저는 기꺼이 사람들과 지식을 같이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중리(中?) 원광사(圓光寺)에 방부를 들이고 있을 때 3~5명을 한 조로 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에게서 국문과 간단하고 이해가 쉬운 불교경전을 배웠습니다. 특히 1949년 신주(新竹)에 있는 불학원인 ‘청초호대만불교강습회’에서 교무주임을 맡으면서 한편으로는 수업을 하며 행정업무도 보고 학생들의 수행도 지도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배우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강의를 하면서 한 학기를 지내다보니 7~8kg이 넘게 몸무게가 빠지기도 했던 것에서 빈승의 교육에 대한 열성과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란(宜蘭)’에 머무르면서 음악을 할 줄 몰랐지만 빈승은 대중을 위해서 ‘홍법자의 노래’ ‘부처님께 얼른 귀의하세’ ‘서방(西方)’ ‘종성(鐘聲)’ ‘불교식 결혼 축가’ 등과 같은 많은 노래가사를 썼습니다. 문예는 몰랐어도 문학은 조금 알고 있었기에 이란에서 문예반을 개설하여 수업을 하였습니다. 또한 아는 범위 내에서 불경강설을 하고 불법을 널리 펼쳐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홍법이생(弘法利生)하였습니다.

점차 저에게는 각계 인사들이 자주 찾아오시는데 교직에 있는 선생님은 교육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을 이야기 하였고 군인들은 군대의 전쟁에 대한 정황에 대해 말을 했고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시시비비를 말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중국대륙에서 일부의 학자, 전문가, 사회명사들이 집중적으로 대만으로 건너왔던 시기로 마땅히 대화를 나눌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그 분들은 “‘이란’이란 지역에 있는 ‘뢰음사’라는 작은 절에서 대화를 나눌만한 스님이 한 명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저를 찾아와 담론을 나눈 것입니다. 저는 마치 한 명의 학생처럼 대화 속에서 그분들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매일 많은 스승들이 제 발로 찾아와서 저에게 백과사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사회를 학교로 삼았는데 “길을 가는 세 사람 가운데 필히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을 할 것도 없이 어느 누구나 다 저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움에서 빈승의 눈은 마치 사진기 같고 귀는 라디오 같았으며 코는 정찰기처럼, 혀는 확성기와 같이 몸과 마음이 연합작용을 하는 것을 느끼면서 임기응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몸은 마치 하나의 기계와도 같았고 사상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하나의 배움에는 학문적인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빈승은 느꼈습니다. 마치 빈승이 가장 잘 하는 것이 음식을 만드는 것이고 가장 많이 참여한 것이 건축인 것처럼 집을 지으려면 먼저 벽돌과 기와를 나르고 모래와 자갈을 시멘트와 반죽을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 단지 옆에서 입만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1967년 저를 위해 가오슝에서 보문유치원을 지었던 인연이 있는 중학교 학력의 목수를 데려다가 불광산을 창건하였습니다. 이 목수가 바로 ‘소정순(蕭頂順)’ 선생으로, 학력은 중학교 졸업에 불과했지만 아주 똑똑하고 영리했습니다. 그 사람과 저는 건축을 배운 적이 없어서 도면을 그릴 줄 몰랐기에 우리는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얼마나 높고 얼마나 길어야 하는지를 의논하였습니다. 이렇게 개산 초기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의 불광산 건설을 이 사람들이 맡아오면서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 집안 자손까지 3대가 함께 건설에 참여해 왔습니다.

저도 그들과 함께 거푸집 대기, 철근 잇기에서부터 초창기 총림학원의 도로작업, 정자, 대웅보전 월대, 영산승경 광장 등에 시멘트를 덮는 일에 빈승은 물론 불학원 학생들도 쇠 잣대로 일일이 칸을 만들고 그리는 일을 맡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공양간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요리사처럼 먼저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씻는 일과 채소를 씻고 다듬는 일부터 시작해 나중에 음식을 볶고 끓이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요리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빈승이 비록 별다른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여 교육발전에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얼마 전인 2015년 1월, 대만 전체 170여개 대학교 총장들이 불타기념관에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교육부에서는 저에게 “전체 총장님들에게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설립한 남화대학교 임총명 총장, 불광대학교 양조상 총장도 빈승에게 “전교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자신의 경력에 근거하여 독학하고 스스로 깨달은 배움의 과정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스스로 배우는 것은 공자의 학습방법으로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였으며 스스로의 깨달음은 부처님의 교육방법으로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함은 깨달음의 원만한 행원(自覺覺他 覺行圓滿)”입니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깨닫는 경험이 지금 빈승이 일을 행하고 빈승의 사상, 빈승의 관념, 빈승의 사람됨과 일을 처리하는 원칙입니다. 빈승이 한 가지 일에서 세 가지를 되돌아보는 습관, 빈승의 이론과 실천에서의 원융추구, 빈승의 승가와 신도의 평등견해 그리고, 불법의 오묘한 이치에 대한 체험까지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는 빈승의 일생에서 매우 유용함을 느끼게 합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98호 / 2017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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