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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수행의 삶에 대한 회고-상

“물긷고 땔감 구하던 고행이 빈승을 완성한 바탕입니다”

▲ 1967년 불광산 개산 이후 인간불교의 세계화를 구현해온 성운대사. 대만 불광산 제공

"대단한 수행이라 할 것도 없지만 빈승은 아침저녁 예불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수시로 염불 7일 정진을 하였고 이란염불회에서는 26년간 연속해서 염불회를 직접 주관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차례, 한 차례의 7일 정진이 적어도 100번이 넘는 것 같습니다. "

“부처님의 자비광명 보리 종자를 이 세상 오대주에 두루 뿌려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즈음에는 그 광명의 빛 우주를 두루 밝히리.”

일반 사람들은 빈승의 삶을 단지 글 좀 쓰고, 단지 행사 좀 하고, 단지 불사 좀 하고, 단지 강연설법을 좀 하고, 단지 일필자 붓글씨 좀 쓰고, 단지 잘나가는 높은 사람을 접대하고, 단지 해외로 잘 다니는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행사를 하고 절을 짓고 강연 설법하는 것은 수행이라고 할 수 없을까요? 수행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빈승 역시 절집 안에서 수행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이라 함은 본래 개인 자신의 밀행(密行)으로 남들에게 공개할 거리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함부로 남을 비평하고 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오늘날 사회의 수많은 입들을 참다못한 제자들이 빈승에게 저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제자들의 그러한 청을 받았기에 이 글의 인연을 통해 대중들에게 간략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77년간 출가생활을 되돌아보면 빈승은 그 어떤 한 수행으로만 수십 년을 하루처럼 살아오지 않았고 전부가 사소한 수행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이고 점철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은 빈승의 일생에서 더 할 수 없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행을 논하자면 3~4세때 저는 외할머니를 따라 불당에 다녔는데 어른들을 따라 염불하며 경행하고 사시예불에 참석하고 절을 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단지 수행을 놀이로 삼았을 뿐인 어린아이 그 자체였습니다. 법당에서 뛰고 떠드는 어린아이였으니 수행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수행을 말하자면 15세부터 시작했다고 하겠습니다.

15세가 되던 해 은사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삼단대계(三壇大戒)를 수지하러 갔습니다. 20세가 되어야 비구 구족계를 받는데 겨우 15세인 제가 받을 자격이 있냐고 은사 스님께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은사 스님은 “사미계라도 받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개당(開堂) 탁진(卓塵) 노화상과 배당(陪堂) 명도(明度) 스님, 전계사 약순(若舜) 노화상, 갈마사, 교수사 스님들이 모두 동의하셔서 저는 삼단대계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노스님들의 증명을 받고 저는 15세에 출가자가 필히 구족하여야 하는 삼단대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53일 간의 수계기간 내내 종일 묵언하면서 “눈은 코를 관하고 코는 마음을 관하듯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지내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필히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는데 한 번 무릎을 꿇었다 하면 3~5시간이었습니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으면 작은 돌멩이가 옷을 파고들어와 무릎에 박히기도 했는데 해산한 후 무릎에 박힌 돌을 빼내면 피가 바짓가랑이를 타고 흘러내리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53일간은 마치 53년처럼 느껴졌었는데 저의 청소년기 수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입니다.

당시 매일 새벽 3시 일어나 아침예불을 하려다 보니 잠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법당에서 범패 리듬에 맞춰 절을 하면서 수십 초 동안 방석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 서원예불 때에 저는 엎드려 있는 잠깐 사이 자주 잠이 들었고 규찰 스님은 일어나라며 제 머리를 발로 찼습니다.

언젠가는 한 강사 스님이 “살생한 적 있느냐?”라고 저에게 물으셨는데 “어린 나이고 수계를 받는 중인데 감히 자신이 살생을 한 적이 있다”고 할 수 없었기에 “살생한 적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더니 강사 스님은 회초리로 바로 머리와 몸을 때리면서 “네가 개미 한 마리도 밟아 죽인 적이 없다는 거냐? 모기 한 마리도 때려죽인 적이 없다고? 어디서 거짓말이야!”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말씀에 저는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 것도 거짓이니 “당연히 맞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강사 스님이 다시 “너는 살생한 적이 있느냐?”라고 물으시기에 더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생 한 적이 있습니다”라며 솔직하게 인정하였는데 “너는 진짜 죄업이 많구나! 죄업이 많아!”라고 하면서 그 스님 역시 버들가지 회초리로 때리면서 야단을 치셨는데 저에게 죄업이 있으니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수계기간 중에는 이렇게 말해도 맞았고 저렇게 대답을 해도 맞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강사 스님들이 무엇이라 물으시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던 저는 “강사님! 때리실 거면 그냥 때리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청소년기에 제가 받았던 절집 교육이었습니다. 그냥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재치 있는 항의였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수계를 받고나서는 몸과 마음을 불교에 공양 올리는 의미로 정수리에 향을 피워 태워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다들 12개의 향 심지를 태웁니다. 은사 스님은 어린 제가 출가에 대한 굳은 마음이 부족할까 염려하셨는지 저를 맡아서 향 심지를 태우는 스님께 향 심지가 큰 것으로 태워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출가자의 표시가 확실히 드러나게 해서 절집을 쉽게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향 심지 12개에 불을 붙이면 천천히 타들어가다가 머리 부분에 닿으면 자연적으로 꺼지게 됩니다. 제 머리위에 올려져있던 향 심지가 정수리에 닿게 되었을 때 저를 맡아서 태워주시던 그 스님은 입을 풍구삼아서 힘껏 불었는데 향 심지 12개의 불길이 연결되어 한 덩어리의 불길로 번지면서 저의 두개골은 움푹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수리에 움푹 파인 곳이 생기면서 기억력이 없어졌고 삭발조차도 불편하였습니다. 이것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빈승은 이로 인해 우둔해졌고 기억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경전을 외우지 못했고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라도 공부를 해도 바로 잊어버려 거의 매일 강사 스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어느 한번은 책을 외우지 못했다고 매를 맞게 되었는데 강사 스님은 저의 손바닥을 때리면서 “참 멍청하구나.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해서 지혜총명을 간구해야지”라고 하셨습니다. 강사 스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어린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이 생긴 것 같아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하고 부탁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법당에 가서 절을 하는 것이 총림에서 어떻게 허용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밤중에 몰래 일어나 절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기척 없이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찾았고 “지성으로 보리심을 내니 연꽃이 도처에서 피어납니다. 제자의 마음이 몽롱하여 관음보살님께 절하며 총명함을 간구하고 지혜를 기도합니다. 나무대자대비관세음보살(悉發菩提心 蓮花遍地生 弟子心朦朧 禮拜觀世音 求聰明 拜智慧 南無大慈大悲觀世音菩薩)”이라고 염원하며 절을 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절을 하면서 기도하면 관음보살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거나 감로수관정을 받게 된다고 하였는데 “저 자신에게 이러한 신기한 영험이 없었다”고 무심한듯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반년이 지나면서 저는 갑자기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풀리면서 “‘고문관지(古文觀止)’ 같은 고전문학의 난해한 경전문구를 대략 한두 번만 읽으면 외울 수 있게 되면서 빈승이 깨우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려면 부처님의 인증을 받아야하기에 빈승은 감히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느 정도 성장의 시간 속에서 운이 트이면 생각이 영특해지듯이 정말로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쉽게 이해됐습니다. 이로서 빈승은 불교의 수행공덕이 높고 높은 산과도 같고 넓디넓은 바다와도 같음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말 부처님의 은혜가 넓고 가득함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면서 신심은 끊임없이 늘어갔습니다.

그 이후 빈승은 불학원에서 공부하던 때와 대만으로 건너온 초기 방부를 들이던 기간을 막론하고 고행을 수행삼아 자신을 연마하고자 공양간 일, 발우공양 음식을 나누고 설거지하는 일, 땔감 구하기, 물 긷기 등 소임을 수년 동안 맡았으며 계속하여 ‘오후불식’과 ‘혈사경’을 하고 나중에는 미국에서 반년 동안 무문관 등 전통적인 수행을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대단한 것이 아니기에 간략하게 한두 가지만 언급하여 불가의 수행역정에서 빈승도 체험을 했었음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단지 이 많은 수행내용은 자아의 분별로 인하여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불교전통의 수행을 지켜나가는 것을 말하자면 빈승은 공부를 하던 ‘서하산’에서 7년여 동안 절 안에서만 지내며 산문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쟈오산에서 매년 참선 7일 정진을 두 번 하였고 수저우(蘇州) 영암산(靈岩山)에서 염불을 발원하기도 했습니다. 절집에서의 아침저녁 예불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수시로 염불 7일 정진을 하였고 이란염불회에서는 26년간 연속해서 염불회를 직접 주관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차례, 한 차례의 7일 정진이 적어도 100번이 넘는 것 같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99호 / 2017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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