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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석주 정일 스님

기자명 이병두

소나무처럼 꼿꼿이 살았던 수행자

▲ 1931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졸업사진. 두 번째 줄 맨 왼쪽이 석주 스님이다.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자신을 정제하고, 물에 담긴 달처럼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대하라(霜松潔操 水月虛襟).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지. 영명연수 선사 문집의 서문에 나오는 글인데, 시류와 이해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탐심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야.”

이판·사판 연연해하지 않고
종단 힘들 때마다 적극 참여
총무원장·승가대학장도 역임
어린이법회·현판 한글화 주도

2004년 ‘법보신문’의 새해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 고(故) 석주 정일(昔珠正一) 스님은 일생을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꼿꼿하게 살았다. 열반에 들기 몇 해 전까지, 90세가 넘는 노구를 이끌고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축제에 참가하여 동대문부터 꿋꿋하게 걸어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본래 조계사까지 걷겠다고 하였는데, 수십 년 젊은 다른 스님들이 사정을 해서 종로3가 관람대에 앉혀드렸던 일화도 있다.)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고 일생 동안 위장 장애로 고생하였다고 하는데, 스님을 존경하여 개인 주치의처럼 돌봐드렸던 의사의 말로는 초음파 검사를 받기 위해 마취에 들었을 때에도 염주를 손에 꽉 쥐고 화두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꼿꼿한 스님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석주 스님은 문턱이 없는 스님이다. 누구든 스님을 친견하고자 찾아오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반갑게 맞는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도 하고, 그렇게 한 세기를 살아오신 분이다.”(‘법보신문’ 2004.1.1.) 스님과 인연을 맺었던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와 똑같이 스님을 회고하며 그리워한다.

1931년 1월,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사교과 제11회 졸업 기념으로 찍은 위 사진에서 두 번째 줄 맨 왼쪽이 스님이다. 갓 스물을 넘긴 젊은 학인 시절의 모습에서부터 이미 범상하지 않은 그 ‘꼿꼿한 기백’이 느껴진다. 사진 옆의 설명으로 보아 대교과(제9회)와 사교과를 마친 학인들을 합쳐 7명이고 지도하던 어른 스님이 3분이다. 아마 학인 한 명 또는 두 명을 상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때가 많았을 것이다. 이 점만으로도 당시 범어사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사찰들이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석주 스님은 숱한 일화를 남긴 분이다.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주석하던 삼청동 칠보사에 유치원과 어린이법회를 열었고, 이 어린이들이 주인공인 리듬합주단은 1970년대 말까지 부처님오신날 제등행렬에서 최고 인기를 누렸다.

운허 스님과 함께 1961년 5월 법보원을 설립하여 역경불사에 힘을 기울였으며, 1964년 동국역경원 설립이후에는 ‘한글대장경’ 편찬사업에 착수, 2002년 완간에 이르기까지 큰 힘을 실어주었다. 스님의 한글 사랑은 칠보사 대웅전에 직접 쓴 ‘큰 법당’ 현판으로 바꾸어 달았던 데에서도 증명되는데, 그 뒤로 전국 여러 곳 사찰에서 한글로 쓴 현판과 주련이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조계종단이 위기에 처할 적이면 아무 조건 없이 총무원장 소임을 맡아 정상화시키고 그 자리를 편하게 떠난 분이기도 하고, 승가대학 초대학장으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분이다. 종단이나 승가대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기까지 스님이 원력과 의지로 기울인 노력과 흘린 땀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밥을 빌어먹어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없어야 승려고, 헐벗은 옷이라도 천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승려다.” 열반에 들기 몇 달 전인 2004년 부처님 오신 날 특집 인터뷰에서 스님이 남긴 당부이다. 스님 말씀대로, 밥을 빌어먹고 누더기 옷을 입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수행자의 길을 가는 승려가 많아져야 불교가 산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399호 / 2017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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