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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한의 시대·승가화상

기자명 오중철

대중과 호흡하던 고승 입적 후엔 신앙 대상

▲ 대족 북산 177호 감실에 모셔진 승가대사상. 주위에 제자인 혜안, 목차의 상과 당시 승가와 함께 신승으로 존숭받던 만회(萬廻)와 지공(志公)이 함께 모셔졌다.

막고굴 72굴 주존상을 모신 감실의 좌측 외벽에는 ‘성자사주화상(聖子泗洲和尙)’이라는 방제 하에 한 스님의 존상이 모셔져 있다. 머리에 바람막이 모자를 두른 채 산을 뒤로하고 물을 마주한 어느 초려에 정좌한 스님의 모습은 성스럽기보다는 친밀하고 소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스님의 도상과 대칭하여 감실의 우측 외벽에 또 다른 스님이 그려져 있는데, 방제는 이것이 ‘성자 류살하 화상’의 존상임을 전한다. 지난 5회의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막고굴 72굴은 주실의 남벽을 양주서상 및 류살하와 관련한 장면들로 채울 정도로 양주서상과 류살하를 특별히 중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주화상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 72굴에서 당시 성승으로 이름을 떨친 류살하와 나란히 배치된 것일까?

신이·법력으로 이름 떨친 승가
입적하자 황제 명으로 등신불
중생 구제한다는 믿음 확산돼
관음보살 화신으로 간주되기도

사주화상의 본래 법명은 승가(僧伽)화상으로, 일찍이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 일대인 사주(泗州) 지역에서 그 법력을 떨쳤기 때문에 사주화상으로도 불리곤 했다. 승가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당 개원 24년(736) 이응이 찬한 ‘사주임회현 보광왕사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승가는 서역의 하국(何國) 사람으로 용삭 연간(661~663) 초에 입당하여 중국 전역을 교화하다가 사주 임회현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보조불(普照佛)을 모신 보광왕사를 창건하였는데, 보조불상의 신이함과 승가의 법력이 동시에 이름이 높아, 각지에서 “성상(聖像)에 참배하고, 진승(眞僧)을 알현”하고자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황실에도 알려져 중종은 709년 그를 내도량으로 모셔 극진히 예우하고, 사주 보광왕사에 친필을 사액하였다. 이듬해 승가대사가 장안의 천복사에서 좌선에 든 채로 입적하였다. 중종은 대사를 애도하고 칙령을 내려 대사를 등신불로 봉안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몸에 옻칠을 하여 공양한 후, 다시 사주 보광왕사에 이안하여 사리탑 안에 안치하였다.

승가의 입적 직후에 새겨진 비문의 기록은 대사가 사주 지역은 물론 황실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고승이었음을 전한다. 그러나 승가대사가 본격적으로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오히려 그의 입적 후의 일이다. 승가는 입멸 후에도 수시로 신이한 화신(化身)을 보임으로써 중생들의 구제에 힘쓴다는 믿음에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 막고굴 72굴 주존 감실 외벽에 모셔진 승가상. 비록 소박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72굴의 특성상 류살하의 존상과 나란히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8세기 말~9세기.

‘송고승전’에는 대사의 입멸 후에도 그의 형상이 출현한 이야기들을 다수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연(燕) 지역의 상인에게 한 승려가 사주 보광왕사로 사찰에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상인들이 물품을 싣고 보광왕사에 도착해서 보니, 자신들이 연에서 만났던 승려의 모습이 탑 속에 안치된 상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불조통기’에 의하면, 1199년 회하(淮河)의 범람으로 인해 송의 수도인 변경(?京)에 대홍수가 발발하여 자라와 악어가 궁궐에 출현하는 등 흉흉하고 위태로웠다. 이때 승가의 형상이 제자인 혜안, 목차와 함께 궁궐에 화현하여 물난리를 멈췄다고 전한다.

승가가 대중들의 폭넓은 신앙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 승가의 현현이 백성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송고승전’에 이르길, 승가는 능히 백병을 치료할 수 있어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큰 눈이 오는 것을 예지하거나,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한다. 도적을 알아보며, 재난과 화를 소멸하는 것을 도와준다.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고, 길흉을 예시하며, 자식을 얻게 해준다. 이처럼 “중생이 기원하는 바가 있으면 그 마음에 따라 모두 이루어지도록 도왔다” 한다.

이와 같은 승가의 현현을 통한 중생구제는 마치 관음보살의 응신을 연상케 하는데, 이는 승가대사가 관음보살의 화현이라는 믿음으로 연결되고, 심지어 ‘승가화상욕입열반설육도집경’과 같은 중국찬술 경이 출현하여 대사를 석가모니의 전신이자 훗날 미륵불의 하생을 맞이할 성인으로 격상시켰다. 승가의 형상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자연스럽게 승가상의 전국적인 유행으로 이어졌다. 장경동에서 발견된 ‘성자 사주승가화상 원념인연’에는, “만약 성자의 초상을 그리거나 만드는 이가 있으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었고 상서로운 감응이 있었다”고 하여, 승가상의 조성이나 모사 자체가 수승한 공덕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무릇 천하에 사찰을 지을 때엔, 반드시 승가의 진상(眞相)을 세웠다” 한다.

▲ 소주 서광사(瑞光寺) 탑 내에 안치된 사리보당에 모셔진 소형의 승가상. 마치 사리함에 진신사리를 모시듯 상을 단지에 모셔놓고, 창을 만들어 예배자가 존상을 참배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이 인상적이다. 송고승전’은 승가대사의 형상이 탑 정상에서 자주 출현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승가대사의 유해가 등신불로 조성되어 탑 내에 안치된 내력과 관련이 있다. 1013년.

승가와 관련된 고고학 자료는 당시 승가대사에 대한 대중들의 신앙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열렬하였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분포지역을 보면 돈황, 장안과 하남, 하북 일대의 중원지역, 대족석굴을 포함하여 협강, 면양, 인수, 대읍 등 사천의 전 지역에서 골고루 분포하고 있으며, 강서, 소주, 절강 등의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 그 형식에 있어서도 단독상, 협시상, 32변상 등으로 다양하며, 조성장소도 석굴, 사찰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사자의 공간인 무덤 내부에 조성된 경우도 보고되었다. 실로 승가상이 형식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대중의 기원에 부응하여 확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당송시기 승가대사에 대한 신앙의 양상을 파악한다면, 막고굴 72굴에서 승가대사의 존상이 류살하와 나란히 배치된 이유를 헤아릴 수 있다. 비록 두 분의 화상이 활동한 시기는 다르지만, 양주서상과 보조불상이라는 성상과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는 점, 대중들과의 호흡 속에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는 점, 입적 후에 오히려 더욱 그 신앙의 폭이 확대되고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되었던 점 등은 양자를 서로 연결 짓는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승가대사를 류살하와 비교할 때, 드러나는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류살하가 그 신앙의 확산에 있어 양주서상이라는 특별한 불상과의 인연에 상당부분 의지하였던 것에 반해, 승가대사의 경우 자신의 형상을 통하여 신앙을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대 이후 고승들의 유해에 옷칠이나 금박을 하여 모시는 등신불 조성의 성행이 갖는 의미를 재고하게 하는 사례이다. 나아가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삼보, 즉 스님들의 행(行)과 신(身)이 곧 불자들의 신앙적 성숙을 위해 더욱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상이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400호 / 2017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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