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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몸보다 마음이 커야

보살은 물질에도 법에도 머물지 않는다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부? 수보리언 심대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조금이라도 상이 있으면
결코 중생 구할 수 없어
법에 머문다고 할지라도
집착이기에 괴로움 불러

사람들은 몸이 큰 것만 치지 마음이 큰 것은 간과한다. 아이들은 몸이 더 크면 다른 아이를 이기지만, 커감에 따라 이기려면 꾀가 즉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충분히 성장하면 외적 마음인 사회적 제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사회적 제도 속에서, 사회적 제도를 통해 획득한 힘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중 최고봉이 왕 등 권력자이다. 하지만 권력이 아무리 커도 권력은 연기(緣起)이므로, 상황이 변하면, 소용이 없다. 왕은 적국의 병사에게는 모욕의 대상이며, 포로가 되면 짚을 깐 땅 바닥에 몸을 뉘여야 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비단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칼이 목을 쓰다듬다가 또 다른 칼이 동맥과 경추(頸椎, 목뼈)를 거침없이 통과해 지나간다.

외부에 쌓지 않고 내부에 복을 쌓아 만든 몸도 연기(緣起)의 산물이라, 아무리 커도 덧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제아무리 존경을 받는 영적 지도자도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망상체(妄想體)이다. 심하면 악마이다. 아크로바틱(曲藝, 곡예)으로 보일 정도로 오묘한 명상도 환상일 뿐이다.

아무리 수천의 종교시설을 짓고 수행자들에게 음식과 물질과 돈을 바쳐도, 타종교인들 눈에는 악마를 돕는 행위이다.

도덕적 황금률로 단련한 마음도 악당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다. 선인도 선함만으로는 화를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칭송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면 언젠가는 화를 당한다. 설사 화가 외적으로는 없을지라도, 내적으로는 다가온다. 그래서 ‘불설비신 시명대신’이다. 색·성·향·미·촉(모습·소리·냄새·맛·감촉)에 머물면 보살이 아니고 법(法 의식의 대상)에 머물러도 보살이 아니다.

중생을 구하는 것은 좋은 일인데 색·성·향·미·촉이 그걸 가능하게 만든다면, 뭐가 문제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색·성·향·미·촉에 머물면 일체 중생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목표는 최고를 지향한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하면 통하지 않는 임시방편이 아니다. 즉, 시공을 초월해 항상 통하는 불후(不朽)의 구제법을 추구한다. 그러려면 상이 없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상이 있으면, 더 작은 상을 지닌 중생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생각은, 그게 어떤 종류이건, 크건 작건, 성스럽건 세속적이건, 일체 없어야 한다. 그게 색·성·향·미·촉에 머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색·성·향·미·촉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몸이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운 모습, 달콤한 소리, 맛있는 음식, 부드러운 감촉을 찾는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생이 다 그렇다. 그래서 옛 스님들은 ‘사람들은 귀한 사람 몸을 받아놓고 몸뚱이를 섬기다 죽는다’고 한탄했다. 이런 것들은 지나가면 그만이다. 마음속에 빛나는 수정으로 자라고 크지 않는다. 35억년 동안, 아직 의식이 출현하기 전까지, 그리고 고등의식이 출현하기 전까지, 인간은 몸뚱이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이 발달하면서 추상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개별적인 현상들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추론해 내게 되었다. 자연계와 생명계와 인간·심리·성품·본성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쌓게 되었다. 무형의 세계를 노닐게 되었다. 무형의 세계에서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식음을 잊고 연구에 몰두하고, 문학작품을 쓰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형의 법(法, 법칙·현상·의식대상)에 머물러도 안 된다. 물질(색·성·향·미·촉)이건 비물질(법)이건, 즐기는 것이 지나쳐 집착이 되어, 결국 괴로움을 불러온다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자들은 자기들의 이론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현상을, 지금까지 알려진 이론 중에, 가장 잘 기술하는 이론이라고 한다. 후에 더 나은 이론이 나오면 그걸로 교체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법에 대한 집착이 없다. 건강한 자세이다.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종교경전에 쓰인 말을 모두 절대적 진리로 추앙하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02호 / 2017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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