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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기자명 조정육

“최선 다했다면 뒤돌아보거나 자책하지 말자”

▲ 박주오, ‘농부의 하루’, 사진, 2015년 : “그는 살아서 세상에 알려진 적도 없다/ 대의원도 군수도, 한 골을 쩌렁쩌렁 울리는 지주도 아니었고/ 후세에 경종을 울릴 만한 계율도 학설도 남기지 못하였다/ 그는 다만 오십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고/ 유월의 햇살과 고추밭과 물감자꽃을 사랑했고/ 토담과 수양버들 그늘과 아주까리 잎새를 미끄러지는/ 작은 바람을 좋아했다.”(이기철, ‘한 농부의 추억’ 중에서) 한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은 위대하다.

모든 일이 다 끝났다. 강의도 끝나고 원고도 끝났다. 심지어는 사람들과의 약속도 다 끝마쳤다. 이제 마음껏 쉬어도 된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가 한없이 좋다. 몇 달 동안 계속 긴장하면서 살아온 탓인지 놀면서도 노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혹시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데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달력을 확인한다. 아무 일정도 적혀 있지 않다. 앞으로 2주 동안은 판판이 놀아도 된다. 심지어는 연재하는 글도 휴가에 들어간다. 넘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앉는다. 그래도 모든 시간이 쉬는 시간이다. 이제부터는 사정없이 일상을 즐겨야겠다.

모든 일 끝나고 찾아온 여유
빨래하고 음식 만들며 염불도
일할 때 일하고 놀 때는 놀며
그 순간 살면 그것으로 충분

한가로움에 들떠 있는데 휴대전화에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뜬다. 지난주에 넘긴 원고를 검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진짜 마지막 일이다 생각하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켜자마자 화면이 딱 멈춘다. 큰일이다. 컴퓨터 본체에 있는 자료들을 외장하드에 저장도 하지 않았는데 다 날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확 밀려온다. 계속 다음으로 미루다가 이렇게 되었다. 동네 컴퓨터 수리점에 전화를 한다. 컴퓨터 전원선을 뺀 후 다시 꽂아보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불이 들어온다. 다행이다. 우선 원고를 검수한 후 메일로 보내고 컴퓨터 본체의 자료를 외장하드 세 개에 차례대로 저장을 한다. 세 번째 외장하드에 저장을 하려는데 화면이 또 저절로 꺼진다. 이미 두 개에 저장을 했으니 상관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수리점에 전화를 한다. 오후에 오겠다고 한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린 후 커피를 끓인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자 온 집안에 커피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커피 한 잔의 사치.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전화를 받고 카톡에 답하고 메일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마트에 간다. 오이 두 개에 천 원. 지난달까지만 해도 다섯 개에 천 원이었는데 그새 2.5배가 올랐다. 폭염과 폭우 피해가 매우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오이를 사들고 집에 돌아와 보니 대문 앞에 택배가 와 있다. 오늘 점심은 비빔국수다. 오이와 묵은 배추김치를 썰어 설탕으로 양념한 후 국수를 끓인다. 국수를 맛있게 먹은 후 어제 사온 옥수수자루 두 망을 들고 마룻바닥에 앉는다. 점심시간부터 3시까지는 더위 때문에 작업이 힘들다. 이때는 무조건 놀아야 한다.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하는 나로서는 집안일 하는 것이 바로 노는 시간이다. 선풍기도 틀고 쓰레기 버릴 봉투까지 가져다 놓는다. 휴대전화도 곁에 두고 물까지 가져다 놓은 후 옥수수를 까기 시작한다. 옥수수는 7월과 8월에 가장 많이 나온다. 이럴 때 까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일 년 내내 싱싱한 옥수수를 먹을 수 있다. 옥수수는 쪄서 먹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깐 옥수수는 밥을 할 때도 넣어 먹고 카레라이스나 짜장밥을 할 때도 넣어 먹는다. 톡톡 터지는 맛은 직접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상상할 수 없다.

옥수수를 까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다. 염불의 장점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등 정신적인 노동을 할 때는 염불할 수 없지만 육체노동을 할 때는 언제든 가능하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도 염불할 수 있고 걷거나 누워서도 할 수 있다. 한참을 염불하며 옥수수를 까다 보면 일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일하는 행위 자체가 염불이 된다. 염불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염불하는 나를 놓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念佛禪)이다. 옥수수를 까면서 염불을 하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수북한 옥수수 알갱이를 보니 뿌듯하다. 다음에 마트 갈 때도 또 사와야겠다. 깐 옥수수를 냉동실에 넣고 청소를 시작한다. 청소가 끝나자 어느새 저녁이다. 컴퓨터 수리를 맡기고 아침에 널어놓은 빨래를 개어 서랍장에 넣는다. 이제는 저녁밥을 준비할 시간이다. 남편이 집에 올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준비한다.

오늘 저녁은 카레라이스다. 반찬은 김치 한 가지면 충분하다. 감자와 양파를 껍질 벗기고 깍둑썰기를 한다. 프라이팬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깍둑썰기한 감자와 양파를 달달 볶다가 물을 붓는다. 뭉근하게 끓여야 하니까 물은 넉넉히 붓는다. 당근은 떨어져서 생략한다. 감자와 양파만 넣어도 오랫동안 끓이면 걸쭉해지면서 깊은 맛이 난다. 카레라이스에는 으레 넣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돼지고기를 넣지 않아도 맛있다. 손가락 마디만 한 고구마도 있어 역시 깍둑썰기해서 넣는다. 오늘 깐 옥수수도 두 주먹 넣는다. 카레라이스에 옥수수를 넣는 것은 나만의 비법이다. 특허 내도 좋을 만큼 맛있는 황금레시피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집에서 밥을 해 먹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냉동실을 활용한다. 제철에 나온 재료들을 구입해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된다. 마늘도 제일 쌀 때 1년분을 구입해 찧어서 냉동실에 보관한다. 곱게 찧은 마늘을 비닐봉투 안에 얇게 펼친 후 냉동실에서 차곡차곡 쌓아 얼리면 필요할 때마다 또각또각 부러뜨려서 쓸 수 있다. 국 끓일 때 쓰는 다시국물도 마찬가지다. 마트에서 싸게 파는 시들시들한 야채를 사다가 멸치, 다시마, 양파, 고추 등을 넣고 들통에 끓이면 훌륭한 다시국물이 된다. 이렇게 만든 다시국물은 먹을 만큼씩 비닐팩에 담아 냉동실에 보관한다. 쓰고 남은 무, 단호박, 고추 등도 썰어서 냉동실에 보관한다. 심지어는 먹다 남은 밥도 냉동실에 얼려 나중에 끓여먹으면 된다. 냉동실 재료로 만든 국과 반찬은 싱싱한 재료로 그때그때 해 먹는 것에 비하면 맛이 떨어진다. 그러나 출근을 하면서 밥과 반찬까지 완벽하게 해 먹을 수는 없다. 그 정도는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대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집밥을 해먹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시간이 되면 집밥을 해 먹고 여의치 않으면 사 먹으면 된다. 완벽한 슈퍼우먼이 되려고 하면 병이 난다. 포기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사는 것도 삶의 지혜다.

자신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으면 더 이상 뒤돌아보면서 자책하면 안 된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의 역할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면서 그 순간을 살면 된다. 오늘 하루도 이 정도면 잘 살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줘도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02호 / 2017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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