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9.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와 오직 하나만 아는 바보-중

백치란 자아 없기에 모든 것 되는 연기적 존재

▲ ‘모르겠습니다’ 고윤숙 화가

‘장자’에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백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령 설결(齧缺)과 문답하는 왕예(王倪)가 그렇다. 설결이 묻는다.
“선생께서는 모두가 다 옳다고 동의할 무언가를 아십니까?(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소.”
“그럼 선생은 선생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십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그렇다면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입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불변의 자아 같은 것이 없음을 안다면
모른다는 대답은 그 본성에 대한 답변
선사들도 백치의 ‘모른다’를 자주 구사

왕예는 세 번의 질문에 모두 ‘모른다’고 대답한 것이니, 아는 것이 없는 자, 머리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백치라 하겠다. 그러나 마지막 대답에 이어 왕예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하지만 시험 삼아 말해보자면,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알지 못함이 아닌지 어찌 알 것이며,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 것인가?”(‘장자 1’, 108)

안다는 게 거꾸로 무지가 아닌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게 아닌지 반문하는 왕예의 대답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 거꾸로 세상을 아는 대로만 보기에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안다는 생각을 접을 때 오히려 세상의 실상에 다가갈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닌지 묻는 말이기도 하다. 왕예의 말이 이어진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이 생기고 반신불수가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은 소와 양, 개와 돼지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소리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누가 올바른 맛을 아는 것인가? 모장과 여희를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도망치고 새는 하늘로 높이 날아가고 사슴은 힘껏 달아난다. 이 네 가지 중 누가 천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가?”

이 놀라운 생각이 왕예가 했던 ‘모른다’는 말의 숨은 뜻이었던 것이다.

백치가 머리가 텅 빈 자라고 한다면, 머리 속이 비어 있음을 뜻하는 이 ‘모른다’는 답은 백치의 일반적인 응답형식이라 할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나온 이 얘기는 ‘응제왕’편에 다시 언급된다. 설결이 스승인 포의자(蒲衣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포의자는 또 다른 백치 얘기를 해준다.

“유우씨(有虞氏)는 자기 마음 속에 인(仁)을 품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니 또한 백성들을 얻었지만 애초에 사람 아닌 자연의 경지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태씨(泰氏)는 누워 잠잘 적에는 느긋했고 깨어있을 때는 어수룩해서, 어느 때에는 자신을 말이라고 여기고 때로는 자신을 소라고 여겼다.”(‘장자 1’, 315)

여기서 태씨는 어수룩하고 우둔하여 자신이 사람인지, 말인지, 소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는 때론 사람이 되고, 때론 말이, 때론 소가 되었음을 뜻한다. 사람이 사람인 채로만 있다면 사람 아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왕예 또한 때론 미꾸라지가 되고, 때론 사슴이 되는 식으로 자신이 선 입장을 바꾸어갈 수 있었기에 그 다른 것들이 느끼는 맛이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치는 머리가 비어 다른 것의 생각이 들어올 여백을 갖는 자일 뿐 아니라, 몸 또한 비어 다른 것이 들어올 여백을 갖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이 되는데 능숙한 자라고 해도 좋겠다.

따라서 백치는 확고한 자아를 찾고자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믿는 이들과 정반대 편에 있다. 그들에겐 자아 같은 게 없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백치는 매우 불교적인 인물임이 드러난다. 자아란 없으며 그때마다 연기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따라 자신의 본성이 달라진다고 하는 게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선승들은 백치들의 ‘모른다’를 자주 구사한다. 무엇보다 ‘벽암록’의 가장 첫 번째 나오는 달마의 ‘모른다’가 그렇다. 달마에게 무제가 물었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렸는데,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

이에 대한 달마의 대답은 “모르겠습니다.”이다. 다시 무제의 얼굴에 덮쳐왔을 당혹감이 눈에 선하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묻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모른다’고 대답한 것이다. 아마도 ‘누구냐’를 묻는 흔한 질문이었을 무제의 물음에 ‘모른다’고 답함으로써 질문 자체를 ‘본성’에 대한 질문으로 승격시킨다. 불변의 자아 같은 것은 없음을 안다면, ‘모른다’는 대답은 그 본성에 대한 대답이다. 또한 그것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자신에게 다가온 것들이 들어설 수 있는 텅 빈 존재, 무규정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대답이다.

이를 안다면, ‘모른다’고 답한 것은 앞의 두 질문 역시 같은 대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제의 공덕이란 사실 불교도의 입장에서 판단한 것이다. 절을 짓기 위해 베어진 소나무들에게 그게 무슨 공덕일 것인가? 성스런 진리를 묻는 질문 또한 그렇다. 소는 풀을 먹으며 사람은 소를 먹는다는 사실은 누구든 다른 것의 신체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표시하지만, 먹히는 토끼나 풀, 소나 돼지에게 그 진리란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두렵고 잔혹한 것일 뿐이다. ‘속제(俗諦)’가 이러하다면, 진제(眞諦)는 그 모든 존재자들이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궁극의 본성은 텅 빈 무규정성을 가질 뿐이다. 그렇게 텅 비어 있기에, 사람이 다가가면 사람의 진리를 비추어주고 소가 다가가면 소의 진리를, 풀이 다가가면 풀의 진리를 비추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디나 있는 것이다.

꿰매고 잇댄 자국이 없는 무봉탑(無縫塔)이란 이런 궁극의 진리를 뜻한다. 꿰매고 잇댄 자국이란 꿰매고 이은 자들이 만들어낸 경계다. 그에 따라 밝음과 어둠이, 좋음과 나쁨의 경계가 그려진다. 그렇게 나름의 그늘을 갖는 탑이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필요한 물건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당 황제 대종(代宗)의 물음에 충국사는 말한다.
“노승에게 무봉탑을 만들어주십시오.”
“스님께서 탑의 모양을 말씀해주십시오.”

충국사는 만들 수 없는 탑을 부탁하니, 대종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달라고 한 셈이다. 충국사는 되돌아온 난문을 받아들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묻는다.

“알았습니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유마힐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황제가 답한다.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모른다’는 대답을 듣는다. 말해보라, 앞서 달마와 같은 백치의 대답일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3호 / 2017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