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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 스님

“불을 켜면 어둠 사라지듯 깨달으면 번뇌 저절로 끊어져”

▲ 종범 스님은 “화엄경이 방대한 양이지만 신심으로 입문해 한 자 한 자 읽다보면 일체중생의 미혹장애는 없어지게 될 것”이라며 꾸준한 공부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제가 법문할 내용은 ‘80화엄경’ 제9권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입니다. ‘화엄경’은 칠처구회(七處九會)라고 하는데 일곱 장소, 아홉 번 법회에서 차례차례로 말씀한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특히 ‘화엄경’은 39품 80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1품에서부터 39품까지 가는 순서를 품차라고 합니다. 또 권이 1권부터 80권까지 가는 것을 권차라고 하고, 권권마다 장수가 있습니다. 제1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가는 것을 장차라고 합니다. 경을 보다 보면 품, 권, 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횟수로는 9회이고 품수로는 39품이고 권수로는 80권인데 이게 많다고들 하는데 많은 것만은 아닙니다. 한꺼번에 통째로 생각해서 ‘너무 많다’ ‘언제 공부를 다 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제1회 설법, 9품 설법, 11권의 설법을 보고 또 보고, 한 10번씩만 보면 익숙해집니다. 우리가 밥 먹고 옷 입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평생을 했기 때문에 익숙한 겁니다. 그런데 ‘화엄경’을 보고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몇 시간 공부했느냐고 물어보면 1시간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생 한 것은 익숙하지만 한 시간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것도 처음부터 쉬워서 익숙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익숙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처음부터 익숙한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익숙함은 없듯이
방대한 양 ‘화엄경’ 공부도
처음엔 어색하고 어렵지만
1품씩 보면 점차 익숙해져

신심과 원력으로 입문해서
한 자씩 꾸준히 읽으면 심취
중생의 미혹장애 곧 사라져

‘화엄경’은 횟수가 9회인데 제2회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또 어떤 횟수는 한 품 뿐인 경우도 있습니다. 10지경 같은 경우는 10지경 1품으로 여섯 권입니다. 또 마지막 ‘입법계품’은 1품인데 21권입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어느 횟수의 몇 품을 딱 잡아서 보고 또 보고 또 다른 해석서를 보면서 공부하면 좋습니다. 해석서로는 ‘지엄소’ ‘의상소’ ‘법장소’ ‘청량소’ ‘통현론’이 있는데 이를 5대 주석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엄, 의상, 법장, 청량 스님과 통현장자가 쓴 해석서인데, 이분들은 전부 ‘화엄경’을 보고 도를 이루어서 완전히 통달하셨습니다.

‘화엄경’을 어렵게 느끼는 것은 안 익혀 봐서 그렇습니다. 밥 먹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밥 먹는 일은 워낙 많이 해봤기 때문에 쉽습니다. 화엄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겁니다. 안해야 될 일을 끊는다고 하고 지운다고 하는데, 그것은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안해야 될 일을 지우려고 하고 안해야 될 일은 끊으려고 하면 잘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는 사람이 텔레비전에서 안 봐도 될 드라마가 더러 있습니다. TV연속극을 안 봐야 한다고 하면서, 보는 것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자꾸 또 보게 됩니다.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그것은 공부를 하면 저절로 끊어집니다. 밖에 돌아다니면서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놀지 말라고 하면 계속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라고 하면 노는 것은 저절로 끊어지게 됩니다. 끊으려고 하지 말고 공부를 하라. 그래서 큰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 “어둠을 없애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불만 켜면 어둠은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번뇌를 끊는다’ ‘업장을 지운다’ 이렇게 하지 말고 공덕을 닦고 공부를 하면 저절로 다 끊어집니다. 드라마를 볼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공부하기 바쁜데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의심이 많습니다. 의심을 끊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의심은 도통견성만 하면 없어집니다. 그래서 ‘도통을 하라’ ‘자성을 봐라’고 하는 겁니다. 자성을 보면 의심은 없어집니다. 불만 켜면 어둠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통달하면 의심이 없어집니다. 의심은 미혹의 산물입니다. 미혹하면 의심이 많아집니다. 통달하면 광명에 의해 의심이 없습니다. 통달은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생로병사하는 생멸자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멸자아가 왜 없느냐, ‘반야심경’에 보면 안이비설신의가 없다고 하는데 왜 없는가? 미혹해서 의심이 가지요. 그런데 진아, 진여실상의 나를 통달하면 안이비설신의가 항상 광명이 나타나는 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옹 스님의 게송을 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안이비설신의에서 항상 붉은 광명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통달하면 육문은 광명이 나오는 문이고, 미혹하면 생로병사하는 안이비설신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통달하면 의심이 없어집니다.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경과 달라서 제1회 보리도량 법회를 초회라고 합니다. 마지막은 제9회라고 하지 않고 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초회는 서언이고 말회는 결언입니다. 중간은 여러 보살행으로 채워져 있는데요, 이것이 전부 중중원융입니다. 한 품만 보면 그 한품에 여러 품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 원융입니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법문이고 전부 여래정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살행을 이야기하거나, 삼매를 이야기하거나, 무엇을 이야기하거나 전부 여래정각의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화엄경’은 방광을 열 번 하는데 그래서 10방광이라고 합니다. 방광은 누가 하느냐, 전부 여래가 합니다. 그래서 방광, 광명을 내뿜는 광명 속에 나타나는 것이 법문인데, ‘화엄경’ 법문 하나하나가 여래의 실상, 여래의 공덕, 여래 광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에선 전부 여래만 방광을 합니다. 그러면 삼매에는 누가 드느냐, 보살이 듭니다. 여래는 방광하고 보살은 입정을 하는데, 보살이 입정을 해서 삼매에 들었을 때 여래의 정각세계와 만날 수 있습니다. 여래의 정각 세계를 이야기해야 되기 때문에 보살은 입정을 하구요, 보살이 설법을 하기 전에 여래는 방광을 해서, 그 광명 속에서 바로 설법하는 것도 ‘화엄경’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크게 깨달은 세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체 경전이 전부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그 정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정각 속에는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시성정각하니, 심지광명이 보주법계’라는 것입니다. 법의 본성인 여래, 몸의 광명, 지혜의 광명이 온 법계를 두루 비추니, 온 우주가 심지광명뿐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지 올리고 할 때 “심지광명 보주법계”라고 매일 외우는 내용이 바로 화엄인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광명이 온 세계 두루 꽉 차고 원융해서, 사람이 생존하든지 사망하든지 걸림이 없다, 있든지 없든지 걸림이 없다, 가든지 오든지 걸림이 없고, 나든지 없어지든지 걸림이 없는 이것이 대각세존, 정각세계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고 딱 믿는 순간에 벌써 거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신심으로 입문하고, 또 한 자를 읽든 두 자를 읽든 읽으면 벌써 성취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믿고 들어가면 일체 중생의 미혹장애는 없어지고, 못 들어가면 안 없어집니다. 그래서 좋은 공부를 하면 나쁜 습관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좋은 공부는 안하고 나쁜 습관을 없애려고 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잘못한다고 나무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잘할 수 있게 인도하면 그만입니다. 잘하면 잘못하는 것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래서 깨닫기 전의 모든 업장은 깨달으면 모두 없어집니다. 깨달아야만 없어지지, 깨닫지 않으면 업장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어둠으로 어둠을 없애려고 하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됩니다.

‘화엄경’이든지 어떤 경이든지 경을 보고 깨달은 도인이 엄청납니다. 경을 보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경을 보는 것을 간경이라고 하는데, 간경에는 독송간경이 있습니다. 그냥 경을 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의해간경이 있습니다. 뜻을 해석한다는 의미지요.  의해간경은 경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해석하기 위해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의해가 아니고 자신이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을 비춘다는 의미로 조심간경이라고 합니다. 조심간경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면, 경을 여는 것처럼 경을 펴고 경을 보면서 자기 마음을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경조심입니다. 그 다음에 의심조경하고, 자기 마음에 의지해 경을 비추어봅니다. 경으로 마음을 보고 마음으로 경을 보고, 이것이 심경상적이요, 마음과 경이 서로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경을 펴고 마음을 보고 마음에 의지해 경을 본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깊이 들어가면 심경이 구멸이라, 마음도 경도 없어집니다. 마음도 없어지고 경도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뿐입니다. 마음도 경도 사라지고 지혜 광명만 둥글고 밝게 되는 경지입니다. 이것이 조심간경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수한 도인이 경을 보다가 깨쳤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도인의 답변이 있는데, 생사문답을 하나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학인이 한 도인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느 곳을 향해 갑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도인이 “문 앞의 차도에 오가는 차들이 많고 많으니라”라고 답했어요. 학인이 다시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도인이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에도 밝고 밝은 넓은 광명이 원만해서 모자람이 하나도 없이 가득했고, 눈빛이 땅에 떨어진 뒤에도 고요한 광명이 항상 충만하니라”라고 말했답니다. 이것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7월23일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53선지식 1000일 화엄대법회’에서 종범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404호 / 2017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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