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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글을 쓰게 된 인연 ②

“부처님 책은 포교 견인하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 불광산 불타기념관의 전경, 웅장하고 장엄하다. 대만 불광산 제공

"모든 불서는 불교문화를 사회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한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온몸을 사르듯이 불교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고자 모두들 자신의 능력을 책을 만드는 일에 쏟아 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서는 지금의 불광산이 있게 한 원인입니다. 책 불사와 함께 저는 인재가 부족하여 그 힘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교육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제가 노스님을 대신해서 산림을 돌보고 있으면서 낮에는 산림 속을 돌아다니는 원숭이와 다람쥐를 보면서 절에서 음식을 보내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고 밤에는 나무사이로 부는 바람소리와 부엉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두막에서 잠을 자는 것뿐이었습니다. 소중한 청춘과 생명을 무의미하게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던 저는 한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오두막 짚더미 옆에 엎드려 ‘소리 없는 노래(無聲息的歌唱)’를 썼는데 이 책이 저의 첫 번째 저술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신주(新竹) 청초호(靑草湖)에서 대만불교강습회 교무업무를 하고 있을 때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일본인 ‘모리시타 다이엔(森下大圓)’의 저서를 번역하여 ‘관세음보살보문품강화(觀世音菩薩普門品講話)’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중앙일보’에서도 저에게 기자가 되어달라고 하였고 심지어 ‘금일청년’ 발행인 ‘진강조(秦江潮)’ 선생이 타이베이에서 원광사로 직접 찾아와 저에게 잡지의 편집자가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청을 저는 모두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요? 저는 스님으로서 잘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옛사람의 시구인 “예전의 약속이 오늘로 다가왔기에 길 떠나기 전에 다시금 생각해보았지만 승려로서 산속에 살고 있어야지 나라 모임에서의 만남은 적절하지 않네(昨日相約今日期 臨行再三又思惟 為僧只宜山中坐 國士宴中不相宜)”라는 글귀를 읽으니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옛 성현 대덕들이 사회의 부귀공명을 마다하고 깊은 산에 기거하며 담백한 생활로 심신을 길렀는데 저도 옛 어른들과 같은 이런 심정과 언행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가난하여 송곳을 꽂을 만한 땅조차 없었지만 저는 저 스스로가 필히 불교를 위해서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게으르지 않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형식적으로 대강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무슨 일을 하던지 불교와 사중의 이익과 관련되면 항상 바로 책임지고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저는 이후 잡지 ‘인생’을 위해 6년간이나 편집일에 봉사하였고 ‘금일불교’의 8개 위원회에서 수석을 맡았습니다. 편집뿐만 아니라 원고쓰기와 발행까지 저 혼자 도맡았으며 심지어 다른 불교잡지를 위해 원고를 써주는 도움을 주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의 정신력과 의지력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관계로 인해 순간 잡지 ‘각세(覺世)’의 창간인인 ‘장소제(張少齊)’ 장자의 신뢰를 받게 되었으며 순간지 ‘각세’의 총편집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빈승은 줄곧 글 쓰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란으로 와서 홍법 교화한지 석 달이 지났을 때로 기억합니다. 신도가 30원을 주고 감옥에서 대나무 의자를 사다 주었는데 저는 매일 저녁 모두가 잠이 들고나면 부처님 앞에 켜있던 전등을 방문 앞으로 끌어와 재봉틀을 책상 삼아 글을 썼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볼 때는 불가사의하다고 느끼겠지만 그 당시 저에게는 아주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그 해에 제가 26살이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전등불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서하산, 쟈오산, 이싱(宜興), 중리, 청초호 등 지역에서는 전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기와 나방이 날아다니고 바퀴벌레가 사방으로 기어 다녀도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아까워 그 다음날 새벽이 밝을 때까지 글을 쓰다가 아침 기상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만족하면서 글쓰기를 멈추었습니다.

그 당시는 젊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서 청년교화와 어린이 교육을 하면서 불교를 위한 행사를 주관했습니다. 나중에 불교 잡지는 너무 보수적이라서 독자들이 많지 않았기에 저는 소설 ‘옥림국사’와 ‘석가모니불전’을 쓰는 모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이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켜 널리 알려지면서 출판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해서 찍어내고 있으니 그 발행량이 백만권이 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는 글을 써도 원고료라고 받은 것이 없어서 완전히 불교 호법의 마음뿐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의외의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호법하고자 발표한 글이 저에게는 파문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동백꽃이 다시 필 때’라는 단편문학소설 한 편으로 ‘진강조 선생’이 직접 저를 찾아와 가르침을 주셨으며 불교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공연을 한 유명 경극배우 ‘고정추(顧正秋)’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하였더니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특히 태허 대사의 주간지 ‘각군’을 인광대사를 기념하는 출판물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는 저의 편지를 받고 ‘주비(朱斐)’ 거사가 ‘각군’의 발행을 접은 뒤 별도로 ‘각생’을 창간하면서 저에게 좋지 않은 파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중화불교미술’에 실린 불상이 머리와 발이 잘린 것은 불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평한 저의 단문은 저에 대한 동초 스님의 불만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불교계 내에서의 질책도 사면팔방으로부터 쏟아졌습니다.

공허한 언론은 불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이후로 저는 글쓰기에 뜻을 두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계를 실제로 개혁하는 운동에 참여하려면 불교회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연이 부족했습니다. 당시 집행부에서 업무를 주관하는 많은 어른 스님들은 저처럼 이렇게 활동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불교회에 있던 그 시기는 필요로 할 때는 저를 부르기도 했다가 거절하기도 하여서 저는 ‘진퇴양난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현명한 새는 나무를 골라서 깃들고 훌륭한 신하는 주군을 선택해 섬긴다(良禽擇木而棲 忠臣擇主而侍)”는 말이 있듯이 저는 제가 따르면서 도와 불교를 혁신할 불교지도자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 역시 중국불교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민해 보았는데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어서는 앞으로 쇠락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당시 빈승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남방불교는 신심이 구족하지만 의지가 부족하며 일본불교는 불교학적 연구가 있지만 계율이 엄격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불교는 도대체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저는 태허 대사 ‘인간불교’의 이념을 실천하기로 결정했으며 ‘인간불교’는 시종일관 제가 지향하고 실천해 나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태허 대사는 어디에 계신가요? 법항(法航) 대사는 어디에 계신가요? 제가 찾았던 많은 어른들 가운데 갑은 이기적이어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셨고 을은 이 사람도 못마땅하고 저 사람도 못마땅해서 날마다 남 탓만 하시고 병은 아침에 했던 말씀이 저녁에는 바뀌어 변화무상하였고 정은 너무 소심하여 일을 감당하는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윗사람도 없고 지도자도 없어서 당시 저는 아주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중에 이란에서 포부를 가진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합창단, 홍법단, 청년단을 조직하였고 문예반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는 구덕감(裘德鑑), 양석명(楊錫銘), 주광유(周廣猷), 주교(朱橋), 임청지(林清志), 오천사(吳天賜), 이신도(李新桃), 장우리(張優理), 오소진(吳素真), 장자련(張慈蓮) 등 청년과 그 뒤에 지역정부의 직원과 전화국 직원인 소혜화(蕭慧華), 이소운(李素雲), 황혜가(黃惠加), 증소월(曾素月), 증운경(曾韻卿), 주정화(朱靜花), 임미삼(林美森) 등 이십여 명은 홍법포교의 역군이 되었습니다. 이들 모두 사회에서 아주 좋은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불교를 신앙하면서 오직 불교를 위해 기여하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중화인쇄소 오천사 거사, 난양여고 이신도 양, 의란세무서 장우리 양, 제약공장 오소진 양 등 청년은 직장을 그만두고 불교를 위해서 일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팀이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천사와 이신도 양에게 불교문화복무처를 설립하라고 지시하고 장우리에게 이란에서 불교유치원을 설립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오소진 양에게는 가오슝에서 유아교육사업을 하면서 가오슝 불교당의 발전을 돕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청년들과 함께 저의 ‘글쓰기’도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새로운 불교를 펼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이념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 동화집’ ‘불교이야기 대전’ ‘불교 소설집’ ‘불교 문집’ 등을 편집 저술하고 심지어는 ‘중영대조불학총서-경전지부(中英對照佛學叢書-經典之部)’ ‘중영대조불학총서-교리지부(敎理之部)’ ‘중영불학사전’과 새롭게 방점을 표기한 ‘매월일경(每月一經)’ ‘불교미술도안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모든 책은 불교문화를 사회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온몸을 사르듯이 불교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고자 모두들  능력을 쏟아 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인재가 부족하여 그 힘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어 교육사업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1963년 우리는 작은 사찰 ‘수산사’에서 불교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불학원 학생을 모집하면 매번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초과되면서 작은 사찰에서는 그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서 불학원을 옮겨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을 수 없었고 간단하나마 양철집이라도 지어 대중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간단한 공간이라도 만족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기회인연 속에서 1967년 우리는 가오슝 마주원에서 불광산을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04호 / 2017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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