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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오래된 집과 제행무상

기자명 조정육

허물어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옛집의 기억’

▲ 김동철, ‘자연별곡1’, 2017년, Oil on Canvas, 44.5×33cm, 개인 : 우리 모두는 나고 자란 고향이 있다. 시간이 흘러 고향이 아닌 곳을 전전할 때도 마음속의 고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태를 묻었던 곳, 어머니의 품 안에서 안심하고 살았던 곳, 그곳이 고향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라 해도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곳은 없다. 제행무상이다.

“옛날에 살던 우리 집 그대로 남아 있을까? 흔적도 없겠지? 한 번만 다시 가봤으면 좋겠는데.”

언니들과 함께 찾아간 고향집
재개발 지정으로 4년째 빈집
폐허가 되어 쓰레기 나뒹굴어
생주이멸 가르침 절실히 느껴

광주 언니 집에 온 지 열흘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언니들이랑 함께 누워 뒹굴뒹굴하던 내가 말했다. 뜬금없다 싶었는지 셋째 언니가 나를 쳐다봤다.

“가면 되지.”

뭐가 문제냐는 듯 넷째 언니가 자신 있게 얘기한다.

“주소를 알아야 가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광주 떠난 지 벌써 30년이잖아.”

어리바리한 내가 풀이 죽어 얘기하자 넷째언니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대답한다.

“광천동 672-5번지.”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몰라서 인터넷에 주소를 입력해봤다. 나왔다! 광천동 672-5번지가 화운로 314번길 11-10이란 새 주소와 함께 떴다. 왜 진즉 이 생각을 못했을까. 주소가 확인되자 조바심이 났다. 두 언니들에게 당장 가자고 졸랐다. 이런 뙤약볕에 어디를 가냐. 저녁에 시원해지면 가자. 쟤가 왜 갑자기 옛날 집은 찾고 그래? 두 언니가 돌아가면서 핀잔을 준다. 갑자기가 아니야.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어. 설마 옛날 주소가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지. 그런데 집이 남아 있을까. 저녁밥까지 먹은 후 드디어 출발했다. 차의 내비게이션에 40년 전의 주소를 입력하자 길 안내 방송이 나왔다. 언니 집에서 겨우 20여분 거리였다.

광주천을 지나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이면도로가 나왔다. 이면도로를 따라 5분 정도 더 들어가니 ‘목적지에 도착하셨습니다’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저 집이 우리 집이라고? 왠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집은 굉장히 컸는데 눈앞에 보이는 집은 아주 작고 낡았다. 일단 차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에 들어선 집들은 거의 80년대 지은 모습 그대로였다. 핸드폰에 뜬 주소를 보면서 계속 골목을 돌아다니자 오른쪽에 익숙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이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아까 그 집이었다. 아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원래 우리 집은 서쪽으로 대문이 나 있었는데 아까 봤던 집은 동쪽 면이었다. 동쪽으로 큰 길이 나는 바람에 그쪽으로 대문을 하나 더 달았던 것 같다. 서쪽으로 난 원래 대문 앞에 서니 내가 살던 기와집이 그 형태 그대로 보였다. 지붕과 담장 사이에 차양을 설치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71년도에 지은 우리 집은 본채가 ‘ㄱ’자에 별채가 ‘一’자로 된 집이었다. 본채는 방이 5개에 부엌이 2개인 기와집이었고, 별채는 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 셋집이 두 개 연이어 있고 마지막에 창고가 붙은 슬라브집이었다. 별채 위로는 옥상이 있어 그곳에 빨래도 말리고 고추도 말렸다. 대문 왼쪽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계단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밖에서 봐도 그 모습 그대로다. 이거 화장실 맞지? 옥상 올라가는 계단이잖아. 저기는 창고네. 세 자매가 철제대문에 얼굴을 붙이고 서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한 번 들어가 볼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에 들어가자고 얘기했다. 저 안에 들어가면 2017년에서 온 세 여인이 1971년의 소녀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벨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사람이 없나 보네. 피서 갔을까. 마당 곳곳에는 신문지며 쓰레기들이 곳곳에 떨어져 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청소도 하지 않나봐. 우리 엄마가 보셨으면 난리가 났겠다.

“이 정도면 딱 50평이다.”

대문에 붙어 서서 집안을 들여다보던 넷째 언니가 자신 있게 얘기했다.

“겨우 50평? 그렇다면 50평에 다섯 세대가 살았단 말이야? 우리 식구가 방 2개를 썼고 우리 옆방에는 곰보 할머니가 살았잖아. 그 할머니가 상하방에 하숙을 쳤었고 아시아자동차 사람들이 하숙을 했잖아. 하숙하던 사람들이 거의 열 명 정도 됐으니까 이 집에 도대체 몇 명이 산거야? 우리 집 여섯 명, 별채에 네 명, 하숙집이 열두 명? 스무 명이 넘네? 아, 근데 여기 목욕탕이 없어서 뒤안에 있는 수돗물 틀어서 목욕했잖아. 그 많은 사람들이 이 좁은 집에서 목욕탕도 없이 어떻게 여름을 견뎠을까? 정말 옛날 사람들 어렵게 살았어.”

불과 40년 전의 일인데도 마치 조선시대에 온 기분이었다.

“우리 이 집 살까?”

내가 그 말을 하자 넷째 언니가 대번에 한마디 한다. 이런 집 사서 뭐하게? 그때 노인 한 분이 지나가다 멈춰 선다. 세 여자가 흥분하며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이상했을 것이다. 노인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자 셋째 언니가 얼른 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 지금은 여기에 누가 사느냐고 묻는다. 4년 전부터 빈집이란다. 동네가 오래전에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사람들이 하나 둘씩 마을을 빠져 나가고 올 12월에는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했다. 어쩐지 문틈으로 들여다 본 집이 폐허처럼 어수선하더라니. 대문 밖에서 한참 동안 시끄럽게 떠들어도 인기척이 없는 이유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우리가 이곳에 살았다는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겠구나. 골목길을 서성거리며 이곳에 들어설 아파트를 생각하는데 머릿속에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단어가 떠나지를 않았다. 이곳에서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이미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은 부모님. 저 골목에서 함께 고무줄하며 놀았던 친구들. 함께 했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생자필멸(生者必滅)과 생주이멸(生住異滅)이란 단어가 절실하게 와 닿았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고 또 무상했다. 이 무상한 시간 속에서 무상하지 않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골목길에 선 세 자매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다시 언니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이토록 옛집에 오고 싶었을까. 단순히 과거가 그리워서였을까. 어쩌면 내가 온 곳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쉰 중반이 넘어서도 아직까지 내가 온 곳을 모르고 갈 곳도 모르는 답답함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아직 내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남은 셈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04호 / 2017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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