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7. 글을 쓰게 된 인연 ③

“비방과 치욕 내려놓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 불광산 장경루 종조전 내부, 벽면에는 성운 대사의 친필이 조각 되어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불광산은 이제 세계무대에서 발전하고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예가 있는 곳에 비방도 따라 온다’고 했듯이 홍법포교의 길에는 늘 비바람이 함께 하였고 좋고 나쁨이 따로 있지 않아서 무상하였지만 저는 일심(一心)으로 불교를 위해 기반을 닦고 두루 좋은 인연을 맺기에 바빴습니다. 명예와 치욕, 비방과 칭찬은 늘 함께 따라다녔지만 굳이 챙기고 구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빈승은 불광산을 위해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문화로 불법을 널리 펼쳤으며, 자선으로 사회복지를 실천하고, 대중수행으로 인심을 정화한다”는 사대 종지를 정하고 쉼없이 실천해 왔습니다. 불광산은 이 네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인재를 끊임없이 키우고 사업을 끊임없이 확대하게 되었는데 소위 말하는 “뜻과 원력이 같으니 함께 한다”라는 말처럼 인연이 있는 신도들과 함께 집단 창작을 하면서 백천만 가지의 힘이 결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로 저는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불법을 널리 펼치고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것을 저의 발원목표로 삼았습니다. 저는 음치라서 염불도 잘 못하는데다가 글씨도 잘 못쓰니 남에게 드러낼 것이 없어서 절집 안에서 그리 쓸모가 많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인재를 육성해야 겠다는 바람에서 불교학원을 확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학원을 늘리고 나니 선생님에게는 월급을 주어야 하고 학생에게는 생활일체를 해결해 주어야 했는데 당시의 젊은 저에게는 실로 큰 부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부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발원과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더 없는 어려움이라도 점차 하나씩 해결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당시 불광산은 끊임없이 불사와 건설을 하고 있었고 신도들도 끊임없이 늘어났으며 10일 마다 한 번씩 40만부씩 발행하는 ‘각세’, 잡지 ‘보문’ ‘불광학보’도 제작해 발간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글쓰기, 교육, 홍법포교, 교화수행, 행사 등등을 모두 관장하면서 그 어느 하나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제 고향 속담에 “낡은 배에 많이 싣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불법에 이롭고 불교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저는 모든 것을 기꺼이 원해서 실행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불광산은 전 세계 무대에서 발전하고 활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명예가 있는 곳에 비방도 따라온다”고 하였듯이 홍법포교의 길에는 늘 비바람이 함께 하였고 좋고 나쁨이 따로 하지 않아서 무상하였지만 저는 일심(一心)으로 불교를 위해 기반을 닦고 두로 좋은 인연을 맺기에 바빠서 명예와 치욕, 비방과 칭찬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저 자신을 잊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불광산을 건설하기 이전에 저는 제가 쓴 ‘석가모니불전’으로 일본 타이쇼대학 박사 반에 입학신청을 한 적이 있었고 학교 측에서도 심의를 거쳐 입학통지서를 보내왔었습니다. 당시 제가 일본으로 유학하려던 생각은 그 당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갔었던 비구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환속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잘 공부하고 돌아와 이러한 역사를 바꾸고 남성 출가자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제자들을 거두어놓고 어찌하여 다시 다른 나라 학교에서 학생을 하러 간다는 말인가, 저에게 귀의한 제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지금 다시 학생 자격으로 공부하러 간다면 당초에 남들의 스승이 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으로 저는 박사를 하지 않기로 하였고 일본유학의 생각을 접었습니다.

이즈음 “‘석가모니불전’ ‘옥림국사(玉琳國師)’ 등과 같이 제가 쓴 소설을 극본으로 만들어 방영하고 싶다”면서 TV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중 ‘옥림국사’는 상하이 지방극단에서 무대극으로 각색하여 타이베이 홍로우(紅樓) 극장에서 공연하였고 공군라디오방송국에서는 연속극으로 녹음하여 라디오에서 방송하였고 ‘천금소저 만금화상(千金小姐萬金和尙)’이라는 이름의 대만어 영화로도 촬영되었습니다. 나중에 구봉(勾峰) 선생이 감독해 ‘재세정연(再世情緣)’이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촬영해 중국TV에서 저녁 8시 연속극으로 방영하였는데 높은 시청률을 올렸고 해외에서도 방영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각 TV방송국의 방영에 맞추어 매일 대본을 써서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홍법포교에 대한 저의 열정이 저에게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금국극장’ 부설의 제작사에서 저의 작품 ‘석가모니불전’을 영화로 찍으려고 하기에 불교를 영화로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판권, 보수를 따지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정황이 그러하였기에 “영화제작의 고문역을 해달라”는 그들의 요청 역시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어 저는 특별히 ‘장화(彰化)’라는 지역에 위치한 스튜디오를 찾았는데 생각지도 않게 감독은 첫 촬영으로 ‘싯다르타’와 ‘야쇼다라’가 껴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문으로서 “이런 장면을 찍으면 안 된다”고 얼른 감독에게 말했더니 그 감독은 정색을 하면서 “스님은 뭘 모르세요! 너무 낙오 됐어요!”라며 야단을 하였습니다. 그 감독의 “모른다”고 하는 훈계를 듣고 나니 저는 그냥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이 장면으로 인해 일부 출가인들이 저의 불교문화복무처를 찾아와서 휩쓸어 버렸고 말레이시아에서 개봉되었을 때는 현지 불자들이 영화관을 에워싸고 개봉철회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일시에 분위기가 바뀌어서 사방에서 질타가 빗발치며 불교계 전체가 저를 나쁘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저에게는 말 못할 고충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국가 감찰위원을 맡고 있는 유연(游娟) 여사가 “자신이 ‘석가전(釋迦傳)’을 편성하여 연속극으로 대만TV 방송국에서 방영하겠다”고 하기에 저는 당연히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하였는데 극중의 인물과 이야기가 모두 전쟁하고 싸우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전혀 없었기에 저 역시 방송된 내용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저를 욕하는 편지가 눈 조각처럼 날아들었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나마 새로운 불교를 한다는 것이 이렇듯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사회에 맞추려니 사회는 저에게 이렇듯 많은 난감함을 주면서 저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저는 불교를 위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제작사와 소통하고 쟁취하고 절충할 힘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점차 노년이 되면서 ‘양혜산(楊惠姍 : 불자로 대만의 유명 여배우이며 유리공예가. 역자 주)’이 “나는 이렇게 일생을 살아왔습니다”라는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기 위해, 또 글을 씀으로 인해 빚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저 역시 이렇게 참고 인내하면서 일생을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든다면 글로 친구를 만나게 된 것으로, 문학은 저에게 많은 벗을 데려와 주었습니다. 일찍이 ‘이란’에서 양존엄(楊尊嚴), 양용부(楊勇溥), 주교(朱橋), 양석명(楊錫銘), 주광유(周廣猷)는 제가 곡을 쓰고 음악으로 불법을 알리며 ‘연우통신(蓮友通訊)’을 편집발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곽사분(郭嗣汾), 공손연(公孫嬿), 아현(瘂弦), 백양(柏楊), 고양(高陽), 사마중원(司馬中原) 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과 저는 아주 친한 글 친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범(何凡), 임해음(林海音)과도 좋은 교분을 맺었으며 그 가운데 맹요(孟瑤), 유방(劉枋) 여사는 불광산에서 십년이 넘도록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그 분들이 당시 저를 출가자라고 냉대하지 않아 ‘신베이터우(新北投)’에 있는 보문정사의 작은 방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었는데 안타깝게도 재능과 재물 이 두 가지가 부족한 저에게는 문인들을 대접할 금전이 부족하였습니다. 또한 그분들과 응대할 재능 또한 없었기에 스스로의 조건이 부끄러워 그분들과 많은 왕래를 갖지 못하였고 당시 문인들은 한 없이 높게만 느껴졌습니다.

1963년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처음 출국해 보고들은 것을 글로 적어 ‘해천유종(海天遊踪)’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저는 국내외에 많은 독자 친구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비록 바빴지만 독자의 호의와 좋은 인연에 보답하고자 저는 매주 하루나 반나절을 정해놓고 산충(三重)에 위치한 문화 복무처에 가서 친필로 답신을 보냈는데 매번 보내야 하는 편지가 60통에서 100여 통이 되었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내는 회답이 저보다 숙련되지 못하다고 자신을 낮추지만 실은 저 자신이 성숙하지 않은 문체로 대강 만들어 보냈다는 것을 저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에 있어서 저는 편지, 기행문, 산문, 소설, 시가 등을 막론하고 갖가지 소재에 대해 기꺼이 시도해 보았기에 나중에 ‘강연집’을 쓰면서 저 자신에게 글 소재들이 아주 풍부하다고 느꼈습니다. 공정하게 말해서 제가 가장 초창기에 쓴 ‘성군선녀가 속세에 내려왔네(星君仙女下凡塵)’와 ‘종교동맹대회(宗教同盟大會)’ 등의 글은 번듯한 자리에 내놓을 작품이 못 되었습니다. 당시는 갓 배우기 시작한 때로, 불법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서툴고 미숙한 작품이었지만 저는 망설임 없이 하찮은 재주를 내보였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05호 / 2017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