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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

삿된 견해 단칼에 잘라내는 최고 금강보검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을 무어라고 부르고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금강반야바라밀이라 부르고 받들어 지니어라.’

마음 맑으면 몸으로 드러나
행복한 마음 미소로 나오듯
32상은 부처님 마음의 현현

이름은 경전의 얼굴이다. 이름을 잘 지어야 대의가 잘 드러난다. 이름은 침묵이 아니지만, 진리를 드러냄에 있어서, 단 한 마디만 하므로 침묵에 가깝다. 하지만 우레와 같은 한마디이다.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모든 걸 잘라내는 금강석처럼, 반야바라밀의 지혜로 모든 삿된 견해를 잘라내라. 그래서 이 경의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다.

고대에는 신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우물 계곡 산 강 하늘땅에 우글우글 살았다. 이들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와 괴롭혔다. 마음에 둥지를 틀고 살면 텃신이 된다. 그게 심해지면 무당이 된다. 이런 환상의 시대에 그게 다 환상이라고 지적한 게 부처님이다. 그걸 듣는 이들은 갑자기 눈앞에서 온갖 어지러운 신들이 사라져 마음의 창이 맑고 밝아졌다. 길흉화복을 농단하고 온갖 희생과 숭배를 강요하며 마음을 짓누르던 신들이 사라지자, 빅뱅이 폭발하듯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들의 환희를 이해하기 어렵다.

‘금강경’에는 부처님을 통해서 실상의 세계로 들어간 제자들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다. 물질세계의 무상이 아니라 마음의 무상과 무아를 본 사람들의 긍지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32상이란 무엇일까? 32상을 다 갖춘 사람이 있다면 기이한 모습이 된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음이 맑으면 몸으로 드러난다. 몸에 병이 있는 게 아닌 한, 몸으로 드러나는 건 마음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없다. 잠시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때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오랫동안 항상 할 수는 없다. 45년간 할 수 없다. 일거수일투족을 벽도 없이 다 드러내놓고 살면서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밝고 인자한 표정도 마음의 현현이다.

1.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는 지성이, 빛을 발하는 백호이다. 2. 조리 있게 법을 설하심이, 가지런한 이빨이다. 날카로운 논증은 송곳니(사자후를 하는 사자의 송곳니)이고, 주제별로 잘라 설법하심은 앞니이고, 이해하기 좋게 차근차근 설명하심은 어금니이다. 3.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음은 긴 혀이다. 4. 법을 전하러 쉼 없이 걸어다님이 사슴 같은 종아리이다. 5.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고,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헤엄쳐 가니, 중생을 등에 태우고 건너가니,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막인 물갈퀴이다. 6. 먼 곳의 사람들에게까지 자비의 손길이 미침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는 긴 팔이다. 7. 무지의 바다에서 등대가 머리 위의 육계이다. 8. 한 번에 한 생각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은 모공 하나에 털 하나이다. 팔만사천 세행이 다 그렇다. 9. 생각이 있으나 번뇌가 가라앉은 것은 소라처럼 말린 털이다. 10. 감미로운 설법 내용은 가릉빈가 목소리이다. 11. 삿된 견해를 쳐부숨과 중생을 위해 찾아가지 않는 곳이 없음이, 손과 발의 바퀴 문양이다. 전륜성왕이 사해를 다 정복하듯 계금취견을 다 정복하는 게 법륜이다. 천릿길 멀다 않고 법에 목마른 중생을 찾아다니시니 큰 수레바퀴이다. 12. 부처님의 지식과 지혜가 대지를 덮을 정도로 넓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이며, 거짓이 아니라 참되므로, ‘이마가 넓고 평평하며 바르다’는 액광평정(額鑛平正)이다. 13.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가득하므로, 사람들이 부처님을 보고 또 보고 싶어하므로, 80종호 중 관무염족(觀無厭足)이다.

위와 같은 해석은 이미 전통적인 해석에 나타나 있다. 32상 중 마지막 특징인 ‘족하평정 두루안지(足下平正 周遍案地)’는 ‘발바닥이 평평하고 반듯하여 두루 땅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인데, 발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생겨 땅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하므로, 이 말의 참뜻은 ‘널리 천하를 주유하며 진리를 설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깨달음의 낙을, 은거하여 홀로 즐기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하고자 하는’ 대승의 사상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05호 / 2017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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