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학 조계종 포교사단 사무국장-상
이성학 조계종 포교사단 사무국장-상
  • 정리=최호승 기자
  • 승인 2017.09.0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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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불교동호회 정착시킨 일꾼

 
“아이를 절에 파시지요.”

관음사 어린이법회로 불연
‘사이버 신행단체’ 운영도
능인선원 IT관리자로 첫발


어머니는 탁발 오신 스님들께 가끔 이런 말을 들었단다. 불연이 지중했음을 직감했는지 어머니는 과감한 행동을 보이시기도 했다. 실제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해남 시골 어느 절에 아들을 팔러(?) 가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어넘기는 하룻밤 해프닝이었지만 잊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생 인연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50살이 넘도록 불교에 푹 빠져 살고 있으니 말이다.

본의 아니게 템플스테이를 경험한 다음 해엔 제 발로 절에 갔다. 연필과 공책을 준다는 친구 말에 끌려서 간 곳이 광주 충장로 백양사 말사 관음사다. 어린이법회에 나가면서 불연은 점점 두터워졌다. 원진 스님을 지도법사로 중등부를 거쳐 고등부까지 활동했다. 이중표 교수, 박경준 교수, 정승석 교수가 대학생이었고 우리를 가르쳤다. 열과 성을 다해 법회에 참석했고, ‘반야심경’을 달달 외워 봉독했다. 당시 주지였던 고 상인 스님에게 오계와 법명 ‘학륜(學輪)’ 을 받고 비로소 당당한 불자로 거듭났다. 1980년 1월 성도재일 때의 일이다. 

전남대 법학과에 진학한 뒤부터는 불교와 좀 멀어졌다. 너무 일찍 접해서인지 실망을 하곤 했다. 2년 정도 부처님오신날만 절에 가는 무늬만 불자를 자처했다. 졸업 후에 발 디딘 사회는 만만치 않았다. 사업 실패의 쓴맛을 보고 여기 저기 직장도 다녔지만 제자리걸음이었다. 별 수 없었다. 결국 제 발로 절을 찾았다. 고시준비로 서울 신림동서 6개월 동안 독방생활을 했다. 근처 사찰 연화정사 청년회에서 교육부장을 맡게 됐다. 그 무렵 인터넷을 두드렸다.

세이클럽 불교동호회 ‘청년불교 우리사랑’을 운영했다. 2000년 1월7일 불법홍포와 회원들간 신행교류에 도움을 주고 싶어 개설된 동호회였다. 2년 만에 4750여명이 넘는 ‘사이버 신행단체’로 성장했다. 세이클럽이 최우수 동호회에게만 주는 ‘보물선 클럽’에 선정되기도 했다.

▲ 능인선원 홍보부 기자들과 함께 개심사로 떠난 순례법회.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자체 지역모임도 결성해 정기모임을 갖는 등 온·오프라인에서 신행활동을 이끌었다. 불교와 관련한 궁금증을 회원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질문과 답변판’이 특징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답변을 달았다. 불교가 좋았고, 아무리 공부해도 질리지 않았다. 수승한 부처님 가르침을 혼자만 알고 있기가 너무 아까웠다. 10년 간 ‘청년불교 우리사랑’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불교가 생업으로 이어지는 시절인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불교언론에 소개된 ‘청년불교 우리사랑’이 능인선원 지광 스님의 눈에 띄었다. 불교에 관한 소양이 있고 홈페이지 관리가 가능한 젊은 불자를 찾던 때였다. 1년 만 함께 하자는 스님의 제안으로 2004년 능인선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IT 담당자로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주로 질문과 답변란을 책임졌다. 불교대학서 공부하며 능인신문 기자와 편집, 사이버불교대학, 방송자막 등 5년 동안 많은 일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 능인선원의 웅장한 포교현장을 보면서 헌신과 하심을 배우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그때 지광 스님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다른 궤도에 놓였을지 모르겠다. 능인선원에서 일하면서 불교계에 첫 발을 들였고, 어느덧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평 연화세계에서 잠깐 일하다 ‘무소유’ 법정 스님과 인연도 닿았다.

정리=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406호 / 2017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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