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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소나무에 앉은 학의 발밑이 한바탕 망신이지-중

유위에 반한 무위가 유토피아는 아니다

▲ ‘무위(無爲)’고윤숙 화가

고상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그 순수한 어떤 것을 그렇지 못한 것과 대립시키고 따로 얻고자 한다는 점이다. 가령 쇤베르크에게 음악을 배웠고 음악에 매우 높은 식견과 섬세한 감각을 갖고 있던 아도르노는 대중음악은 물론 재즈조차 쉬운 재미나 쾌감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이라고 비판한다.

귀농을 자연적인 삶이라 말하지만
김매기는 자연의 생명 죽이는 작업
전통 파괴 ‘미래주의’ 파시즘 흘러

“모차르트를 재즈로 편곡할 경우 편곡자는 모차르트 곡이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어려울 경우 또는 별 이유 없이 멜로디를 다르게 바꾼다. 그는 물론 보통의 관례보다 더 단순한 방법으로 멜로디를 조화시킴으로써 모차르트를 변질시킨다.”(‘계몽의 변증법’)

재즈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재즈에 대한 어이없는 무지의 산물임을 안다. 재즈는 즉흥성과 더불어 변주를 요체로 하지만 이는 복잡하고 세련된 것을 단순화하지 않으며 고상한 곡을 천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즉흥적인 변주를 하기 위해 중세 선법, 12음기법 등과 같은 다양한 기술을 연구하고 연마하기도 했다. 거기서 문제는 저 뻔해 보이는 곡을 나름의 색조를 만들면서 얼마나 다르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가다.

미래주의자들은 고결한 척하는 이런 식의 예술을 혐오한다. “차체의 폭발적인 호흡에 비유되는 사포와 같은 커다란 파이프가 장식되어 있는 경주용 자동차-포탄을 타고 가는 것처럼 소리내는 자동차가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보다 더 아름답다.” 1909년 마리네티가 쓴 ‘미래주의 선언’의 일부다. 루솔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피아노 소리보다 차라리 자동차의 경적소리, 파이프에 물 흘러가는 소리, 기차 가는 소리 같은 도시의 소음들이 더 아름답다면서 소음을 내는 장치를 고안해서 소음연주를 하고 돌아다녔다. 이는 ‘화음’이나 악기의 소리만을 음악적 소리라고 간주하던 오래된 믿음을 크게 뒤 흔들었고, 악기 소리 아닌 것을 음악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음악의 중요한 발생지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맥락이나 의미는 다르지만, 인의예지를 말하는 도덕을 들어 고상함, 고결함을 추구하는 것을 겨냥해 ‘유위’라고 비판하는 장자도 유사한 느낌이다. 자연 그대로의 본성대로 살아가고 타고난 덕을 따라 행하도록 인위적인 지식이나 도덕, 기술이나 잣대를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게 무위(無爲)다.

이처럼 무위를 행하기 위해선 유위를 떠나야 한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유위적인 것을 버리고 깨버려야 한다. “[타고난] 도와 덕을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인의(仁義)를 채택할 수 있으며…오성(五聲)을 더럽히지 않고서 누가 육률(六律)에 맞출 수 있겠는가.”(‘장자 2’, 43) 좀 더 과격하게 말할 때는 정말 미래주의자 말과 닮았다. “육률의 가락을 흩트려 버리고 악기를 태워 버리고 사광(師曠)의 귀를 막아버려야만 천하에 비로소 사람들이 밝은 귀를 갖게 될 것이며”(67) “성인을 배격하고 도둑질을 내버려두어야 천하가 비로소 다스려질 것이다.”(62) 유위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무위’의 주장이 성인을 배격하고 악기를 태워버리라고 할 때는 백남준만큼이나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위가 유위를 배제한 반대의 영역이 되면, 고상한 예술이 천한 예술을 배제한 별개의 영역이 된 것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반면 유위 없이 무위가 행해지던 시대에 대한 얘기는 무위가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즉 무위로 지덕을 이룬 시대에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유유자적했으며 눈매 또한 밝고 환했다. 그때는 산에 지름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다. 만물이 무리지어 살았고 사는 마을은 이어져 있었으며 그 때문에 짐승들을 끈으로 묶어 끌고 다니며 놀 수 있었고 새 둥지를 손으로 끌어당겨 안을 들려다볼 수 있었다. 성인이 애써 인을 행하고 발돋음하여 의를 행함에 이르러 천하가 비로소 의심하게 되었다…무릇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를 해치지 않고 누가 희준 같은 제기(祭器) 만들 수 있으며…타고난 성정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 예악을 쓸 수 있겠는가.”(‘장자 2’, 43)

이런 무위의 개념은 요순에 의해 무위의 정치가 무너진 지 한참을 지난 지금도 매혹적으로 보이는 듯하다. 가령 기계나 컴퓨터, 핸드폰으로 상징되는 현대 기술에 비해 바늘이나 등불의 발명이 훨씬 더 위대한 것이었다고 대비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계공업에 반대하여 장인적 제작으로 돌아가자며 공예운동과 DIY를 주장하던 윌리엄 모리스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장인적 제작은 인간이 손대지 않은 무위일까? 바늘이나 등불은 정말 인위적인 것 없는 무위일까? ‘장자’에선 자나 먹줄을 쓰는 것도 유위라고 비판하는데, 망치와 끌을 쓰는 걸 어찌 무위라 할까? 바늘이나 등불이 컴퓨터보다 더 위대하다 함은 그것보다 더 훌륭한 발명품, 더 탁월한 유위라는 말 아닐까? 귀농을 이런 맥락에서 인위적인 삶과 대비되는 ‘자연적’ 삶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북미인디언들은 땅을 가는 것을 어머니 대지인 자연에 칼질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김매기는 손으로 하나 약으로 하나 ‘잡초’라는 이름하에 엄청난 자연의 생명을 죽이는 작업이다. 기계를 쓰지 않는다 해도 농사는,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작물을 키우는 것인 한, 결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는’ 무위라 할 수 없다.

프랑스의 문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랑쇼는 이런 무위의 개념을 가령 독서에 도입해 ‘무위의 독서’를 말한 적이 있다(‘미래의 책’).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눈과 생각을 맡겨두는 독서. 이 개념에 꽂혔는지 프랑스 철학자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 대해 심오한 철학적 논변을 펼친 바 있다(‘무위의 공동체’). 어떤 과제도 설정하지 않고 어떤 계획이나 작업(모두 외브르(oeuvre)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데, 불어로 ‘무위’는 이 단어에 부정의 접두사를 붙인 데죄브르(desouevre)다)도 하려고 하지 않는 공동체. 이에 대해 블랑쇼는 자신에게서 가져간 이 ‘무위’라는 개념을 사용해 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해선 안된다고 응답한다. 만드는 순간 이미 유위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두 경우 모두 무위란 유위와 반대말이 되고 만다.

사실 미래주의는 ‘조화로운 소리’, 고상한 음악에 대한 비판으로선 유의미했지만, 그와 반대로 조화로움의 해체,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감각의 와해를 목표로 삼았기에 파괴를 지향하는 운동이 되고 만다. ‘미래주의 선언’은 처음부터 이를 명시했다. “오늘날까지 문학은 골치 아픈 정체성, 황홀경 및 수면상태를 찬양했다. 우린 공격적인 움직임, 열정적 불면증, 레이서의 활보, 대담한 도약, 따귀, 주먹질을 찬양하겠다.” 이런 생각이 파괴와 전쟁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약간의 대담함만 있으면 된다. “우리는 전쟁(세상의 유일한 위생학), 군국주의를, 애국주의를, 무정부주의자들의 파괴행위를, 그것을 위해 죽는 아름다운 이상주의를, 여성경멸을 찬양하겠다.”(‘미래주의 선언’) 실제로 미래주의자들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지지하여 전쟁에 참여하며, 미래주의자 보치오니는 결국 그 전쟁에서 사망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6호 / 2017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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