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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글을 쓰게 된 인연 ④

“왜 글을 쓰냐고요? 문자반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 성운 대사가 프로그램 제작자들과 불광위성TV방송국 개국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누군가 “빈승은 생명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저의 생명은 글 쓰는 속에 있고 강연하여 홍법 포교하는 속에 있으며 신앙적 수지(修持) 속에 있으며 널리 좋은 인연을 맺는 가운데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도량을 건립하는 등의 불사는 모두의 팀워크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저의 공로로 감히 자처하지 못합니다."

1950년대 초기에 불교를 지키고자 빈승이 썼던 문장들이 사람들의 비평과 욕설을 받았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청년시절부터 여러 종류의 불교잡지를 만들기 위해 편집 일을 하면서 오로지 불교계의 평론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성격을 갖고 있어서 불교계의 시시비비, 삿되고 올바른, 선악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사람을 해외로 파견하여 불교 국제화에 힘쓰고 불교회의 힘을 기르고 인재를 훈련하여 신도의 자격심사제도와 불교고시제도를 확립하자”고 중국불교회에 건의하였습니다. 혹은 정부에 부처님오신날의 국가제정을 촉구하고 사찰 주지와 관리인을 스님 한 사람이 통일해서 맡는 것을 주장하였으며 “‘바이바이’(拜拜 : 도교사당에서 향을 피우며 신에게 재를 올리는 행위. 역자 주)를 단속할 것이 아니라 ‘바이바이를 개선해서 계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정부에서 자선 단체에 상을 주고 표창하는 것에 대해 이는 불교를 타락하게 만드는 조치로서 정부에서는 불교가 문화교육과 포교에 종사하도록 격려해야 할 것이라고 기탄없이 말했습니다. 이러한 주장 모두 당시 보수적인 대만불교에 확실히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지만 차후에 불교지위를 끌어올리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빈승은 불학원을 세웠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공평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다른 사람도 필히 저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자들의 신심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고 또 이 길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저는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규정에 따르면서 교육 불사로 인재를 키워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로 불광산이 발전을 하면서 신도들도 저의 저술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어 불법이 더욱 널리 보급되고 생활화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비록 1997년 우리는 위성 텔레비전방송국 ‘인간위시(人間衛視)’를 설립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시작했던 텔레비전 홍법포교도 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매주 한 시간을 구매하여 불교프로그램을 하기로 대만 TV방송국 ‘유진위(劉震慰)’ 사장과 이야기가 되어 방송을 결정했지만 방송 직전 프로그램이 취소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신용을 지키지 않는 겁니까?”라고 제가 물으니 대만 TV방송국 사람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저희가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요. ‘장부인’(장개석 총통부인 송미령을 지칭하는 말. 역자 주)께서 불교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된다고 하셔서요”라고 곤혹스러워 하며 답했습니다.

다른 한 번은 중화 TV방송국과 함께 ‘감로’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하기로 하고 저는 일간신문에 특별히 광고까지 실어 불자에게 널리 알려서 시청하도록 홍보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방영하는 당일 아침 일찍 저는 “이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 없다”라는 갑작스러운 통고를 받았습니다. 저는 급히 방송국으로 찾아가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프로그램을 그렇게 취소한다”는 통고 한 마디로 취소할 수 있는 겁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그 사람은 “스님은 텔레비전에 나오실 수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텔레비전 연속극에도 스님들이 자주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재차 물었더니 그 사람은 당당하다는 듯이 “그 사람들은 모두 가짜 스님이잖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진짜 스님은 안 되고 가짜 스님은 되는 이 세상에서 무슨 정의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그 사람들이 ‘장부인’을 무서워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불교를 배척하였던 것일까요? 그 진상은 제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경국 총통 집권 이후에 저는 텔레비전에서 거리낌 없이 설법하며 불법을 전했습니다. 특히 당시 대만에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단지 세 군데 뿐이었고 서로 간에 왕래를 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저만 매일 세 곳의 방송국을 돌아다녔으며 세 곳의 방송국 모두 저의 ‘법어 방송’을 방영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중국 TV방송국에서 ‘신심문’과 ‘성운설(星雲說)’을 강설하였고 중화 TV방송국에서는 ‘성운법어’를 방영하였고 대만 TV방송국에서는 ‘성운선화(星雲禪話)’ ‘매일일게(每日一偈)’ ‘성운설유(星雲說喩)’를 방영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민간전민TV’(民視 : 대만 첫 번째 민간 무선 텔레비전 방송국. 역자 주)는 ‘성운법어’를 한동안 방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좋은 인연들은 ‘주지민(周志敏)’ 여사의 도움에 감사해야 할 대목입니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사회자이자 제작자인 주 여사는 방송권에서 어느 정도의 힘이 있었기에 저의 텔레비전 홍법포교에 대한 기여가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저의 문장이 책으로 인쇄되고 방송국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과 영화의 드라마로 만들어 지거나 심지어는 2D, 3D, 4D의 온갖 도서, 만화영화, 단편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현대의 인터넷 IT기술로서 아무리 먼 곳이라도, 우리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이 전 세계에 여러 나라의 언어로 진선미의 이념을 전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입니까?

홍법 포교와 글쓰기의 이념에 대해 빈승은 문학의 겉옷과 철학적인 내실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은 아름다워야 하고 철학은 특히 이론을 갖추고 있으니 안팎으로 상응한다면 장편이든 단편이든 필히 좋은 문장이 됩니다. ‘호적(胡適)’ 선생이 “‘유마힐경’은 세상에서 가장 긴 구어체 시(詩)이고 ‘화엄경’과 ‘대보적경’은 장편 혹은 단편의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불학이란은 문학과 철학이 합쳐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왜 제가 일생으로 이렇게 글 쓰는 것을 좋아하냐고 누군가 저에게 묻기에 문자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순환으로 홍법포교의 자원이자 양식이 되어주며 사람이 없어도 문자반야는 남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사람은 한 마디 말에서 금생과 내생까지도 그 영향을 받기도 하고 불교에 대해서 호감을 느낍니다. 문자를 매개로 하면 이 시대와 이 지역의 사람만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을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 년 이후에 이 지구와 다른 천체의 중생들까지도 문자반야 속에서 실상반야의 오묘한 이치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나중에 제자들을 이끌고 ‘불광대사전’과 ‘중국불교경전보장정선백화판(中國佛教經典寶藏精選白話版)’ ‘법장문고(法藏文庫)’를 집대성했습니다. 우리는 1977년부터 4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불광대장경(佛光大藏經)’을 편수하고 있는데 나중에 전부 출판되면 1000여권의 대작이 될 것입니다. 이 외에도 저는 ‘왕사백어(往事百語)’ ‘불교총서(佛教叢書)’ ‘불광교과서(佛光教科書)’ ‘인간불교시리즈(人間佛教系列)’ ‘승사백강(僧事百講)’ 등 수 백 권의 책을 비롯해 인간불교와 관련된 교재를 편집 저술하였습니다. 그것은 승단에서 청년 양성에 쓰이도록 하는 바람에서 제작 출간했습니다.

특히 2000년 일간신문 ‘인간복보(人間福報)’ 창간 이후 저는 신문 첫 면에 칼럼을 쓰기 시작하여 매일 원고를 쓰지 않을 수 없도록 저 자신에게 부담을 주었습니다. 15년 이래로 저는 한 번도 자리를 채우지 못한 적이 없으며 ‘미오지간(迷悟之間)’ ‘성운법어(星雲法語)’ ‘인간만사(人間萬事)’ ‘성운선화(星雲禪話)’ ‘성운설게(星雲說偈)’를 각각 3년간 연재하였는데 어느 제자가 “이런 것도 글쓰기 기네스 기록에 신청해야 한다”고 농담을 하였습니다.

빈승은 당초 20세가 안되었던 시기에 불교개혁과 앞날을 위해 두 팔을 들고 외치던 승려청년으로서 대만으로 건너와 홍법포교를 위해 강연하고 사찰을 지어 승가를 안돈시키면서 펜대 한 자루로 생존하고 의지하였습니다. 나중에 불교의 문화교육 사업을 펼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와 출판 책으로 만들어 전 세계 여러 곳에 전해 주었습니다. 저의 이러한 일생 역시 문자를 편집하고 저술하는 인연으로, 시야를 확대하고 각계의 인물들과 인사들을 널리 사귀게 되었으니 글쓰기는 저의 생명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 빈승은 늙어서 눈도 보이지 않아 이제는 책도 읽을 수 없지만 저는 대만 국사관(國史館)의 요청을 받아 구술방식으로 해서 160만 글자의 ‘백년불연(百年佛緣)’을 출판하였습니다. 최근에 다시 구술방식으로 ‘빈승이 할 말이 있습니다’를 쓰게 되었는데 사실 이는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저는 단지 일부 불교단체가 사회매체의 비판으로 상처를 입었기에 불교를 보호하고자 하는 심정에서 ‘빈승이 할 말이 있습니다’라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글을 발표한 이후 각계에서 저에게 보여준 격려로 저는 본래 두 번째, 세 번째 할 말까지 쓰면 되었다는 생각이었지만 열렬한 호응 속에서 현재 40편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은 저의 일생에서 글쓰기를 해 온 대략의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빈승은 생명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저의 생명은 글 쓰는 속에 있고 강연하여 홍법 포교하는 속에 있으며 신앙적 수지(修持) 속에 있으며 널리 좋은 인연을 맺는 가운데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기타 대학교를 설립하고 도량을 건립하는 등 불사는 모두 다 승가와 신도 이부대중의 팀워크로 이루어진 것이고 모두의 단체 창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서 저 개인이 공로를 감히 자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06호 / 2017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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