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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깨달음은 물고기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

이때 수보리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이해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그러더니 부처님께 말했다. 희유한 일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심오한 경전을 설하였사오나, 제가 지혜의 눈을 얻은 이래로 지금까지 이런 경전은 얻어 들은 적이 없사옵니다.

시공이 변하고 의식 변하면
그에 걸맞는 새 깨달음 필요

‘금강경’ 중 가장 감동적인 구절이다. 어느 종교경전에도 이처럼 순결한 장면이 이처럼 순결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평소에 자기 깜냥으로 지혜의 눈을 얻었노라고 자부했건만, 그래서 더 이상 나의 지성을 자극할 말은 없을 것이라고 교만한 마음을 내었건만, 그날 부처님의 말씀에 그만 무너져 내린다. 세상에 이런 (영적인) 신천지(tera incognita)가 있을 줄이야! 그래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봄비처럼 흐느껴 운다. 종교가 초창기에 화산처럼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을 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때 놀라움과 감동이 환희와 울음으로 나타난다.

펑펑 눈물을 흘리는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 ‘얘가 오늘 따라 왜 이럴까?’ ‘내 설법이 오늘은 좀 괜찮았나?’ 이러셨을까? 아니면 ‘불쌍한 중생, 아직 감정을 극복하지 못했구나’ 하셨을까? 어느 경우든지 ‘금강경’의 저자는, 독자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만큼 그에게는 귀하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몇 번이나,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던 철학적 기반과 인생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가? 수보리는 바로 그런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자기가 얻은 과거의 지혜와 비교하여 ‘아종석래소득혜안’이라 하고, 연이어 ‘미증득문 여시지경’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들은 적 없는, 오늘 처음 듣는 법문이란 과연 무엇일까? 지금까지 들은 걸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시인 성취제일희유공덕. 세존시실상자즉시비실상 시고여래설명실상.

진화의 길에는 방향성이 없다. 몸의 진화도 그러하고, 마음의 진화도 그러하다. 단세포 생물인 원핵세포에서 진핵세포로, 어류에서 파충류로, 포유류로, 영장류로, 유인원으로, 그리고 마침내 인간으로 진화할 줄 누가 알았는가? 무감정에서 감정으로 진화할 줄 누가 알았는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다시 의식에서 자의식으로 진화할 줄 누가 알았는가? 소승에서 대승으로 진화할 줄 누가 알았는가?

깨달음을 언어에 가두면 안 된다. 깨달음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이다. 시공이 변하고 의식이 변하면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실상(實相)은 실상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실상일 뿐이다. 실상은 특정한 시공 안에서의 실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면 깨달음은 시공을 통해 되풀이되는 지겨운 일이 되고 만다. 보살은 무한히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자아가, 즉 사상(四相)이 없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경전을 얻어 듣고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나, 만약 1500년 후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얻어 듣고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가장 드문 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아상도 없고 인상·중생상·수자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상은 상이 아니고 인상·중생상·수자상도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을 떠난 걸 일러 부처라 하옵니다.

아상(我相)이 상(相)이 아닌 이유는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유위법적인 상을 벗어나야 부처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을 떠난 후 1500년 후에 이 경전을 바로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부처님의 현존 아래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비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다. 수보리의 울음은 이런 사실에 대한 개안(開眼)에 연유하기도 한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06호 / 2017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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