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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유근택

기자명 임연숙

지나간 시간을 산책하듯 기억하다

▲ ‘산책-남자’, 180×147cm, 한지에 수묵채색, 2017년.

하루가 다르게 맑고 높아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길고 지루했던 여름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다. 얼마 전 그 더위의 끝 무렵 유근택 작가의 개인전을 만났다. 2014년 조계사 근처 미술관에서 본 개인전 이후 3년 만이다. 전시장은 3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다. ‘도서관’ ‘산책’ ‘방’ 시리즈이다. 도서관 시리즈 작품들은 대작들이었는데, 단색화의 질감이 고요한 느낌을 준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것은 두꺼운 물감의 물질성이라기보다는 겹겹이 쌓아올려진 한지와 호분, 먹으로 이루어진 화면이다.

전통회화에서 시작된 작품
풍경시리즈로 자신 내려놔
진솔함 더해 공감대를 형성

전통회화를 전공하는 작가들은 급변하는 서양미술의 획기적이며 과감한 시도와 대변되는 전통 동양회화와의 미학적 접근의 차이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과 갈등을 겪는다. 유근택 작가는 이러한 질문과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 풍경시리즈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기를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관념미학이나 사의적 산수가 아닌 나와 내 주변을,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 표현하고, 이러한 작가의 진솔함은 현대의 감상자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 낸다. 작가는 동양회화의 거시적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주변과 현실 풍경에서 해답을 찾은 듯하다. 전통의 기법을 벗어나 현대미술에 방점을 찍고 싶어도, 전환기의 과정에 대학을 다닌 세대는 늘 전통에 한 발을 넣고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던지 끌어안던지 하는 것만이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는 방법일 듯싶다.

버스로 출퇴근하면서 문득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달라진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계절에 따라 바뀌는 나무일 수도 있고, 아파트 벽의 색일 수도 있고, 비가 오거나 안 오거나에 따른 강물의 높이일 수도 있다. 매일 같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자연의 이치는 5년, 10년이 지난 후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도 그러하다. 똑 같은 매일이지만 지나고 보면 사는 곳이 달라져있기도 하고 일이 달라져 있기도 하고 작게는 몸무게가 달라져 있기도 하다. 유근택의 ‘산책-남자’는 작가가 작업실 근처 성북동 성곽길을 산책하면서 남긴 기록이다. 매일 같은 산책길이지만 같지 않은 산책길이다.

나무나 풀, 길의 형태를 명확한 방식이 아닌 온몸으로 느껴지는 아련한 기억을 꺼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아마도 정선이 실경산수를 그리면서 실경을 묘사하지만 재구성하여 눈에 보이는 화면 그 자체에 공간을 통째로 느끼게 만드는 것과도 같아 보인다. 산책길에 만난 숲의 냄새, 온도, 기분을 그림에 표현하려고 하는 작가의 의도 때문인지 그림 속에 이런 오감의 느낌이 느껴진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이 아니었을까. 남자는 산책길의 맑은 숲의 공기를 들여 마셨을 것이다. 때는 봄이었을 것 같다. 나도 초봄에 산책길에서 문득 석양을 등지고 저런 느낌이 있었을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공기가, 향기가 기억나는 듯싶다.
얇은 한지에 수묵의 느낌과 발묵의 느낌은 없지만, 한지의 바탕을 메꾸고 그린 그림 속에는 드로잉과 수묵화로 다져진 작가의 깊이를 알기에 나무 하나하나의 묘사에서 탄탄한 작가의 기량이 느껴진다. 보통 얇은 한지에 수묵의 번지는 느낌과 자연스럽게 물과 어우러져 농담을 내는 느낌이지만 작가는 화면을 메꾸어 나무와 잎, 사람을 표현하고, 또 그 위에 많은 터치를 가미하여 필선을 의도적으로 흩트렸다. 사람의 형상도 보일 듯 말듯 풍경 속에 녹아 있다고 해야 할까. 안경을 쓴, 양복을 입은, 실제 산책길에는 적절치 않은 복장의 이 인물은 마치 산수화속의 선비의 모습을 현대 언어로 풀어낸 것은 아닐까. 동시대 언어에 주목하여 작가의 현재와 지금의 우리를 담아내는 치열함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다.

“이번 전시의 가장 커다란 맥락은 ‘어떤 산책’이라는 개념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풍경을 들여다보고, 우리 시대의 지나간 시간들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인문학적인 산책을 하듯이 전체 전시장을 구성할 생각입니다.”(작가 인터뷰 중 일부)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전시팀장 curator@sejongpac.or.kr
 

[1406호 / 2017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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