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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빈승의 의식주행(衣食住行)-상

“인연 따라 가장 간단하게 사는 게 잘사는 것입니다”

▲ 불광산 개산 초기 불광산의 스님과 불자들이 불사를 위한 건물 자재를 옮기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제게 다른 장점은 없지만 저는 재물에 대해 마음을 두고 살지 않았기에 이 점은 빈승 자신이 그나마 ‘잘해냈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세상의 가난과 부유함을 금전으로 헤아린다면 돈이 있으면 부자이고 돈이 없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입고 먹고 거주하고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따지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인연에 따라서 간단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이렇듯 입고 먹고 기거하고 움직이는 생활과 관련해서 빈승이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비록 여담이기는 하나 빈승의 생활 및 정황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면 거기에 배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빈승에게 다른 장점은 없지만 저는 재물에 대해 마음을 두고 살지 않았기에 이 점은 빈승 자신이 그나마 “잘해냈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세상의 가난과 부유함을 금전으로 헤아린다면 돈이 있으면 부자이고 돈이 없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빈승의 일생을 되돌아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집에 돈이 없어서 옷을 사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위로 형님과 누님이 계셨기에 어려서 저는 줄곧 물려받은 옷을 입었습니다. 열 살이 되었을 때 모친은 저를 위해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의 생일 하루 전에 다 만든 옷을 건네주시면서 내일 열 번째 생일에 이 새 옷을 입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날아갈 듯이 기뻐서 펄쩍 뛰면서 옷을 베개 옆에 두고 내일 날이 밝아서 입을 새 옷이 있다는 생각으로 벅찼습니다.

한여름이라 모기에 시달리다보니 철이 없던 저는 1m도 넘는 긴 모깃불의 한쪽에 불을 붙여서 근처에 두었는데 다른 한쪽 부분이 옷 위에 걸쳐진 것을 모르고 잠이 들었습니다. 한 밤중에 모깃불이 옷을 태우면서 저도 놀라서 깨어났습니다. 이렇게 하여 허무하게 새 옷은 없어졌지만 남의 탓도 못하고 새 옷을 입을 복이 없다고 스스로를 탓하면서 인간세상에서 새것과 낡은 것을 구분하는 망상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12세때 출가는 우연히 결정한 것이어서 갑자기 입을 옷이 없었기에 은사 스님은 사형이 입던 낡은 옷 두벌을 빌려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옷은 몸을 가릴 수 있으면 되지 무슨 새 옷과 헌옷의 구분을 하는가하는 생각에서 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사형이 입던 옷을 제가 이어받아 입다보니 옷에 구멍이 자주 났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은사 스님께 차마 말씀드리지 못하고 패지통을 뒤져서 종이를 찾아 구멍 난 부분에 맞게 꿰매었고 신발바닥이 터져도 두꺼운 합판지로 대어 신고 다녔습니다. 그 두 벌의 헌옷을 입고 두 번의 겨울과 여름을 보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 말에 ‘어린애는 엉덩이에 불길을 달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린이와 장독은 얼지 않는다”는 의미로, 두 번의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냈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운명이 바뀌어서 저의 전계대화상이신 약순(若舜) 노스님이 입적하시자 자비하신 은사 스님은 노스님의 옷가지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저에게 주셨습니다. 다행이 저는 그 옷들을 입고 여러 해를 보내게 되었는데 옷이 헤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는데 옷의 수명이 길고 짧음이 옷감재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입적하신 노스님의 옷을 물려받은 것 외에도 그분의 됨됨이를 이어받고 덕행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옷에 대해서 빈승은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지만 젊은이의 뱃속은 대부분 허기가 채워진 적이 없었습니다. ‘서하사’는 가난한 절이라서 강원을 세우고 승가를 키워낼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은사 스님과 주요 소임 스님들의 불법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율학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 때는 항전시기라서 솥에서 물이 끓고 있어도 그 솥에 넣고 끓일 곡식이 없었기에 사중 소임자 스님들이 동네에서 쌀을 빌려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당시는 일년 사계절에서 제대로 된 한 끼를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점심 발우공양에 밥과 한 가지 반찬이 나왔는데 약간의 채소 잎이 담겨있던 반찬국물에는 적지 않은 벌레들이 떠있었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국물로 옷을 빨아도 옷이 더럽혀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불쌍한 저는 기름기가 없었던 탓인지 한 끼에 6~7공기의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차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매일 세끼 비지를 먹었고 두부는 손님용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만약 비지를 솥에서 볶거나 굽기만 했어도 먹을 만 했을 텐데 우리 원주 스님은 항상 비지를 햇빛에 말렸다가 소금으로 간을 해서 우리들이 먹도록 했습니다. 비지를 말리다보면 새들도 와서 먹고 벌레들도 날아들었기 때문에 우리 밥상에 오르게 되면 항상 새똥이나 작은 벌레들이 섞여있었고 역겨운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짠맛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숨을 멈추고 한 두입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6~7년의 시간을 ‘서하산’에서 보냈습니다.

18세가 된 빈승이 전장(鎭江) 초산불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생활이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당시 ‘금산퇴자고민향 상주천녕호공양 초산포자개삼강 상해모모사리랍강(金山腿子高旻香 常州天寧好供養 焦山包子蓋三江 上海某某寺??腔)’이라는 노랫말이 있었는데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가부좌 좌선을 잘 한다고 해도 2~3시간 정도 오래 앉을 수 있어야 진산 강천사(金山江天寺) 선방이나 양저우 고민사(揚州 高旻寺)에 입방할 수 있으니 한 번 앉으면 여러 시간을 앉아야 합니다.” 창저우 천녕사 세끼 음식은 수준이 있게 제공되고 쟈오산 정혜사는 매년 7번의 참선정진을 49일간 해야 하는데 저녁 시간에 1시간 45분간 좌선 후 채소 만두를 한사람에 한 개씩 나눠줍니다. 우리들 젊은 학승들이 참선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 채소만두를 먹으려고 낮에 좌선을 하는 외에도 저녁 시간의 그 1시간 45분짜리 좌선을 매일 기꺼이 앉아 있었습니다.

중국대륙 이싱(宜興)에 있는 종찰 대각사와 난징 화장사(南京華藏寺)에서는 힘들고 가난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난한 생활에서 빈승은 전혀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불법의 선열법희(禪悅法喜)를 간혹 느끼면서 우리는 마음 편하고 충실하게 보냈습니다.

빈승이 23세에 대만으로 건너오면서 이곳저곳에서 방부를 들이고자 하였으나 받아주는 곳이 없었는데 묘과 노스님께서 받아주셔서 중리원광사(中?圓光寺)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기름기 없이 익힌 양배추를 일 년 넘도록 매일 먹다보니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신주청초호(新竹靑草湖) 영은사(靈隱寺)에서 강원을 개설하면서 저는 대만불교강습회(불학원) 교무주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청초호는 관광지여서 평소 관광객이 아주 많았는데 손님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2년 가까이 줄곧 우리 강습회 교직자와 학생들이 먹었습니다. 우리들이 먹는 것은 모두 ‘맥스팩터’(미국산 색조화장품, 중국어로 ‘밀사불타 蜜絲佛陀’라 음역. 역자 주)라고 학생들은 자조하였습니다. 그 당시 여성 대다수가 ‘맥스팩터’ 화장품을 발랐는데 그 음식에서는 자연적으로 화장품 냄새가 나기도 했습니다. 비록 이렇게 지냈지만 우리는 궁색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손님들은 ‘미스(Miss, 밀사 蜜絲)’이니까 우리는 팩터(佛陀)를 하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붓다’인데 무슨 궁색함을 느끼겠습니까?

저는 어려서 출가하여 총림생활의 발우공양이 밥과 한 가지 반찬이었기에 일찍부터 간단하게 먹는 식생활에 익숙하였습니다. 어느 한번은 대만 경무처(警務處) 처장 도일산(陶一珊) 선생이 저의 ‘석가모니전’ 책을 읽고 나서 저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대만 북동쪽 ‘이란(宜蘭)’에 머물고 있었기에 가오슝에 가는 길에 타이베이에 들리면 보자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그가 살고 있는 집에서 식당에서 배달해 왔다는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저와 둘이서 식사를 하였는데 정말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가오슝으로 가려는 저를 위해 처장은 특별히 기차표 한 장을 구해 주었습니다. 침대와 세면대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차량 실내를 보고 저는 아마도 대통령이 탑승하는 전용 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그분과 더는 왕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저는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빈승이 26세때 ‘이란’에 오게 되었는데 평생 전등불을 사용한 적이 없었던 저는 갑자기 이란 시내에 위치한 ‘뢰음사’란 작은 절의 법당 부처님께 매월 대만 돈 20원을 내는 전등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밤 9~10시가 되어 신도들이 돌아가고 나면 저는 불빛을 조금만 나눠달라고 부처님께 부탁 드렸습니다. 그 시대는 민간에서 사적으로 전기줄을 이을 수 있었는데 전깃줄이 길지 않았기에 저는 전등을 법당 옆 숙소 방문까지 끌어와서 절반은 법당을 비추고 절반의 불빛이 비춰지는 책상으로 쓰는 재봉틀 위에서 ‘옥림국사’와 ‘석가모니불전’을 썼기에 방문을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전에 저는 ‘소리없는 노래’ ‘관세음보살보문품 강화’를 출판한 적 있었지만 그 판매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은 줄곧 좋은 판매성적을 올리면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홍콩 등지에서 매번 수백 권씩 구매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 두 권의 책은 베스트셀러이며 베스트셀러 차트에서 장기간 독주하고 있습니다.

이 책 두 권으로 인해서 저는 경제적으로 조금 개선되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겨서 타이베이 시내 중심가 여러 서점에 가져가서 유통시켜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아무리 부탁을 하여도 그 서점의 주인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불교 책은 보는 사람이 없고 또 놓아둘 곳도 없다는 그 사람들의 말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책을 그냥 당신들에게 줄 테니 책을 판돈은 모두 당신들이 갖고 저한테는 한 푼도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불교 책을 놓을 공간이 없다는 말로 여전히 거절을 하였기에 저는 머쓱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빈승의 ‘이란염불회’ 초기 생활은 식탁의 경우 나무판 두 개를 이어서 만든 것이라서 식탁 중간 틈으로 자주 젓가락이 빠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숟가락은 양철을 손으로 두들겨서 만든 것이라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기에 주워 다가 국물을 떠먹어야만 했습니다. 잠을 자는 침대는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대나무 침상으로 올라앉기만 해도 삐거덕 소리가 몇 미터 밖에서도 다 들렸습니다. 1953년으로 기억하는데 ‘엄장수(嚴長壽)’ 선생의 부친 엄병염(嚴炳炎) 노선생은 우리 청년을 아주 아끼시는 분으로 언젠가 저를 보러 이란으로 찾아오셨는데 저와 한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대나무 침상에서 나는 소리가 밖에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몸을 뒤척이지 말고 자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 ‘엄장수’ 선생에게 제가 이 말을 해주었더니 당시의 난감했던 생활에 대해 탄식해 마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화장실을 가려면 15분에서 20분을 걸어가서 이란 기차역에서 볼일을 볼 수 있었고 씻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란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석 달이 지나면서 감옥에서 싸게 샀다면서 신도가 대나무 의자를 저에게 갖다 주면서 저는 긴 걸상에서 등받이 대나무 의자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의 의식주행은 모든 면에서 점차 나아지게 되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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