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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리풋타 존자의 수행지도와 한계

“나의 지도 받음으로써 그는 아라한 될지니”

 ▲ 그림=근호

부처님의 으뜸 제자인 사리풋타 존자에게 제자 한 사람이 새로 들어왔는데, 그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다. 존자는 젊고 건강한 그가 정욕이 강하리라고 생각하여 몸에 대한 혐오감과 더러움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을 시켰고, 제자는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열심히 수행했다.

사리풋타 지도받은 젊은 비구
넉달 수행에도 마음진보 없어
부처님 지도로 일체번뇌 해탈
근기 따라서 수행법 지도해야

하지만 한 달 동안 정진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의 마음은 진보는커녕 안정조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리풋타 존자는 수행법을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준 다음 더 열심히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다시 석 달 간을 더 수행했지만 젊은 비구의 수행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서 머뭇거릴 뿐 진보되지 않았다.

자신의 한계를 느낀 사리풋타 존자는 제자를 데리고 부처님께 나아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 젊은 비구에게 수행을 지도했습니다만, 그는 마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풋타여, 중생의 생각과 기질을 맨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십바라밀을 성취한 여래를 제하고는 아무도 없느니라.”

부처님은 당신만이 갖고 계신 특별한 능력으로 젊은 비구의 전생을 살펴보셨다. 그럼으로써 부처님께서는 그가 수많은 전생을 통해 금세공을 하는 집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셨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생각하셨다.

‘이 젊은 비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마금색의 꽃을 만들기를 염원하며 금을 세공하는 일을 해왔다. 그런 그에게 혐오감을 주는 수행을 시킨다면 그는 수행법에 공감하지 못하여 도와 과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수행 대상을 주어 그가 그것에 잘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부처님께서 사리풋타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사리풋타여, 그대가 이 비구에게 몸에 대한 혐오감과 더러움을 관찰하는 수행법을 주었기 때문에 그가 싫증을 느끼게 되어 지난 여러 달 동안 그의 수행이 진보되지 않았던 것이니라. 그러나 나의 지도를 받음으로써 그는 오늘 아침 공양이 끝나자마자 아라한이 될 것이니라. 이 젊은이는 내가 지도할 터이니 그대는 그대가 할 일을 하도록 하여라.”

사리풋타 존자를 돌려보내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젊은 비구에게 새로운 수행법을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황금 연꽃을 하나 만드신 다음 그것을 젊은 비구에게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비구여, 너는 이 연꽃을 사원의 구석에 있는 모래 언덕에 꽂고 그 앞에 가부좌로 앉아 ‘핏빛 붉은색’이라고 외도록 하여라.”

그 수행법이 젊은 비구에게 딱 맞는다는 것은 그가 연꽃을 보는 순간부터 증명되었다. 그는 부처님에게 황금 연꽃을 받아들자마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을 뿐 아니라 큰 환희심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젊은 비구는 기쁜 마음으로 꽃을 갖고 가 수도원 한 구석에 있는 모래 언덕에 꽂은 다음 그것을 관찰하며 ‘핏빛 붉은색’을 외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휘젓던 초조와 불안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는 대상에 마음이 잘 집중되어 제1선정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연이어 그다음, 그다음 선정으로 점차적으로 진보하여 네 번째 선정에 들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마음에 잡념이 끼어드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그의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의 수행을 돕기 위해 그가 집중하고 있는 눈앞의 황금 연꽃을 변화시키셨다. 그에 따라 아름답고 찬란하던 황금 연꽃은 시커먼 색깔로 변한 다음 마침내는 힘없이 부스러져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젊은 비구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마음이 없는 황금조차도 이렇게 쇠멸하는 것이라면 몸을 가진 인간에게 늙음과 죽음이 닥쳐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제행무상의 이치를 깨우친 다음에, 그는 일체개고와 제법무아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젊은 비구 앞에 몇 명의 소년들이 연못에 들어가서는 연꽃을 꺾어 못둑 위에 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연못 속에서 싱싱하게 피어 있는 꽃들과 못둑에 꺾여 나와 시들기 시작하는 연꽃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아, 마음이 없는 저 연꽃에게도 여지없이 쇠멸이 찾아오는 것이라면 세간에 집착하는 중생에게 어찌 쇠멸과 늙음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젊은 비구는 이렇게 생명의 무상함, 고통의 엄연함, 무아의 진실함을 다시 한번 더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고 있는 젊은 비구 앞에 갑자기 부처님이 나타나셨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처소에서 머물러 계신 상태로 광명에 가득한 모습을 그 비구 앞에 나투셨던 것이다. 젊은 비구는 얼굴을 마주하듯 자신 앞에 나타나신 부처님께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를 올렸고, 그 순간 젊은 비구는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한 아라한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필자는 우리 불교계의 수행 지도 풍토를 생각하게 된다. 현재 우리 불교계에는 수많은 선지식들이 있다. 문제는 그분들 중 대다수가 한 가지 수행법만을 만병통치 식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위빠싸나면 위빠싸나라는 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 수행법만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의 질병이 그렇듯이 중생의 근기 또한 천 가지도 넘고, 만 가지도 넘는다. 이는 모든 중생에게 알맞은 단 한 가지 수행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법이 다양한 것은 그 때문이며, 같은 방법으로 지도한다고 해도 지도 받는 이의 기질과 성향을 고려하여 강약과 완급이 조절되어야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수행법만을 고집스레 주장하는 선지식이 있다면 그는 위가 나쁘든 폐가 나쁘든 장이 나쁘든 가리지 않고 아스피린만을 처방하는 의사와 같다고 하겠다.

나아가, 만일 수행을 원하는 이의 기질과 성향이 자신의 지도 역량 밖에 있다고 판단될 경우 선지식은 사리풋타 존자가 그런 것처럼 그 수행자를 그에게 알맞은 다른 수행처를 찾아가도록 권유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지식을 현실에서 보기는 어렵다. 왜 그럴까? 필자는 그 원인이, 선지식을 자임하는 그분에게 제자와 명성에 대한 욕망이 온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또는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국집하여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있기(管見)’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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