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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정은지

기자명 구담 스님

사찰 꽃살문과 분청사기의 만남

 
▲ 불일미술관에서 열린 정은지 개인전 ‘분청 꽃살문 합(盒)’ 전시 작품.

공예는 회화나 조각과 달리 조형예술이면서도 그 쓰임새가 작품에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 사용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공예 중에서도 도예는 물, 흙, 불에다가 사람의 손길과 기계적 공정을 거쳐 천연의 질감을 가진 독특한 단단함으로 조형의 공간미를 차지하는 특징이 있다.

사찰 꽃살문, 분청 도자로
세월에 바라지않는 경건함
불교디자인의 새로운 발견

도예라는 기물(器物)의 점토에 여러 색을 입힌 꽃살문 장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꽃살문은 불교가 황폐해지던 조선시대에 꽃을 피워낸 소박한 민초들의 정서가 오롯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고려불교의 귀족성이 아닌 전쟁으로 시름한 채 부처에 귀의하는 중생들의 부처를 위한 꽃 한 송이 새기고자 하는 마음을 조각해낸 자취가 바로 사찰 꽃살문이다.

그래서 사찰 꽃살문을 극락으로 가는 출구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돌아올 길 없는 혼백을 위해 법당 문턱에 무릎 꿇고 애면글면 치성으로 합장하는 중생이거나, 저 아득히 먼 해탈의 문고리 틈새 울분으로 토해낸 수행자의 사자후가 조각되어진 불가의 외마디 비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짠함과 출세간의 비정에서 소출해낸 가장 한국적 미감이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정은지 작가는 사찰의 꽃살문 문양을 분청 도자에 재현하기 위해 제작기법과 모티브를 전통에서 길어와 현대의 도자가로 재해석한 작업을 지속해왔다. 작품으로 선보인 ‘합(盒)’의 기물은 만드는 이가 무엇을 상상하든, 다루는 이의 쓰임에 따라 제 몫을 재설정하는 실용적인 장식 용기가 되었다.

작가는 단국대 도예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사찰 꽃살문 작업을 위해 용문사, 범어사, 전등사 등 직접 사찰을 찾아 여행을 하면서 일일이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 지침서로 관조 스님의 유작 사진집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다른 분청사기에 비해 장식 단계에서 색을 덧칠하고, 무늬를 새기고, 긁어내는 과정이 필요해 시간이 2~3배 더 소요된다. 하지만 불교 고유의 전통미를 간직한 꽃살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포기하지 않고 더 즐거운 작업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고 밝은 의미를 부여한다.

보통의 제작 과정은 물레성형, 반건조 굽깍기, 장식 및 조각, 건조, 1차 소성(초벌), 유약처리, 2차 소성(재벌)의 단계를 거친다. 그런데 정은지 작가는 완성된 기물의 형태에 화장토를 여러 겹 칠하고 무늬 장식의 조각을 긁어내 원래의 점토색이 드러나도록 하는 공정을 다시 한 번 거친다. 완성된 도구(그릇)에는 담백한 선묘와 부피감 있는 면의 확장이라는 특징에서 지난 옛것이라는 멋과 도자 기물만의 단아한 힘이 느껴진다.

작가는 꽃살문을 주제로 작업하면서 향로, 화기, 다기잔 등의 형태로 다각화하여 그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새로운 기형의 창작이 불교문화의 소산에서 비롯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사찰의 꽃살문 장식은 나무 소재인지라 풍화되어 부서져 버리지만 도자기에 새겨진 꽃살이야말로 세월에 바라지 않는 경건함으로 현대의 시대정신에도 부합하는 창조성이 엿보인다.

원시적인 공예의 기질은 어쨌거나 일상에서 쓰여질 때 그 빛을 더욱 발하는 법이다. 불일미술관에서 열린 정은지 작가의 ‘분청 꽃살문 합(盒)’ 전시에서 꽃살의 날살과 띠살이 조화로운 간격으로 짜여진 코스처럼, 분청도자와 꽃살문이 불성의 깨우침인 꽃봉오리로 만개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현대 불교의 요원함인 실용적 가치를 예술 속에서 꽃피운 것으로 불교미술의 확장이라는 측면과 불교 디자인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불교 공예의 숨은 보석을 캐내는 의미심장한 설레임이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구담 스님 불일미술관 학예실장 puoom@naver.com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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