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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 인물화에서 옛 선지식 가르침을 듣다

  • 불서
  • 입력 2017.09.18 15:45
  • 수정 2017.09.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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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 정안 스님 해제·이용윤 해설 / 조계종출판사

▲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진단지피 천축지골
(震旦之皮 天竺之骨)
화월이풍 여동생발
(華月夷風 如動生髮)
혼구일촉 법해고주
(昏衢一燭 法海孤舟)
명호불민만세천추
(鳴乎不泯萬歲千秋)

“진단의 피부이며 천축의 골수이자/ 중국의 달과 동이의 바람이다./ 살아 있는 듯 머리털이 자라고/ 어둠을 비추는 등불로 법의 바다에 외로운 배로/ 아아~ 천년만세에 남아있게 하시었네.”

합천 해인사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불심인임제종태고하오세벽송당지엄진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6호)’에 새겨진 청허휴정의 영찬이다. 조선 전기에 활동한 벽송 스님은 부용영관과 경성일선을 배출해 불교 전통이 서산휴정과 부휴선수에게 이어지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벽계정심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전수받음으로써 고려 말 태고보우로부터 환암혼수와 구곡각운 이후 면면히 이어지던 선맥을 다시 일으킨 선지식이다.

이처럼 불교가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달마 선풍과 임제종 법통을 일으켜 후대에 전한 벽송 스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법손인 청허휴정이 찬문에 담은 것이다. 옛 스님들의 진영에는 이렇듯 후손들이 스승을 기리는 찬문이 새겨져 있어, 후대인들로 하여금 진영의 주인공이 어떤 이물이었는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라 했듯, 이 또한 제대로 보고 알아야 그 뜻을 음미할 수 있고 옛 선지식도 기릴 수 있을 터다.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은 현대인들이 주마간산 격으로 보고 지나치는 진영 속 인물에 대한 깊은 뜻을 길어올려 알기 쉽게 풀이했다. 불교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한 정안 스님이 원문을 해석했고, 이용윤 문화재전문위원이 해설을 붙였다.

“저 가운데 즐기고 농락한 시간이 얼마인가/ 시간 밖에 봄꽃이 수없이 늘어져 향기롭고/ 한 번 앉으니 그렇게 선정삼매의 경계이니/ 푸른 봉우리 끝없고 바다는 무궁하다.” 가락국에 불교를 세운 장유 화상의 진영에 실린 금파경호 스님의 영찬을 시작으로, 지은이를 알 수 없으나 “한 선풍을 놓아 백운 속에 부니/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 아름답게 피네/ 오탁에 막힌 의심을 열게 할 뿐만 아니라/ 능히 모든 중생들을 정토에 이르게 하네.”라고 아도 스님을 찬탄한 영찬 등 모두 100명의 선지식들에 대한 기록이 담겼다.

▲ 부용영관, 경성일선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해 태고보우로부터 이어온 선맥을 후세에 전한 벽송지엄 스님의 진영.

선지식들의 진영이 일반 초상화와 달리 특별한 것은 주인공을 얼마나 흡사하게 그렸는가보다는 대상의 정신, 혹은 사상을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에서 풀이한 찬문이다. 찬문은 진영 주인공의 생전 인상이나 행적, 또는 사상이나 업적 등을 기록한 짧은 글이다. 그래서 찬문을 쓰는 이 또한 상당한 수준의 선적 깨달음을 얻었거나, 공부가 무르익은 당대의 선지식들일 수밖에 없다. 진영 속 주인공이 살던 시대가 다른 만큼, 글을 쓴 찬자 역시 다양하다. 주인공의 제자이거나 잘 알고 지내던 문인·사대부가 주로 찬문을 썼다.

이에 따라 후인들은 진영에 나타나 있는 선사들의 모습이나 인상, 그리고 찬문에 기록된 행적 등을 곱씹어 보며 진영의 주인공이 생전에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어떠한 정신으로 수행해 왔는지 형상 너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다.

책 속 찬문 중 오암의민 스님 진영에 기록된 “형상은 본래 거짓, 그림자가 어찌 참모습이겠는가/ 용모가 존재하나 용모가 아니고 몸을 떠나니 곧 몸이네/ 멀리 와서 모습 알기 어렵고 갈 곳을 찾지만 인연이 없다/ 낱낱이 부인하고 누구를 볼거나.”라는 찬문은 주인공 스스로 지은 내용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얽매이지 말고 참모습을 찾으라는 선사의 절절한 당부에서 후학을 아끼고 걱정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책장을 넘기며 100명의 인물을 차례로 만나는 동안 한 폭 인물화에서 활발발하게 살아간 선사들의 삶과 정신을 읽고 가슴에 새길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3만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408호 / 2017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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