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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빈승의 의식주행(衣食住行)-하

“예전엔 수십리길 걸었는데 그 어떤 차면 어떻습니까?”

▲ 성운대사는 자녀를 불광산에 보낸 부모에게 감사한다. 자녀들에게 불교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인연 공덕을 맺어줬기 때문이다. 성운대사는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의 공부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1993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불광가족회’를 열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빈승에게는 자신만의 교통 공구가 생겼으니 더욱 편리해졌습니다. 불광산에서는 저를 위해 7~8명이 탈 수 있는 국산자동차 한 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실제적으로 매번 탑승하는 사람이 4명이 넘다보니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차 안에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원로인 자혜, 자용 스님 등도 불광산에서 중요한 소임을 맡고 있으니 현재 다들 각자 전용의 차량을 쓰고 있지만 저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제 차에는 간혹 열 명 넘게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빈승은 점차적으로 ‘이란’ 지역에서 청년과 어린이들을 교화하여 합창단과 학생회, 문예반, 아동반 등을 결성해 포교에 매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가 ‘인간불교’를 펼치고 있다”고 말했었는데 우리는 아침에는 참선을, 저녁에는 염불을 하였습니다. 경전 강설을 하거나 설법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있는 불자들도 같이 참석하였기에 저는 “참선과 염불을 함께 수행하며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배워나간다”는 아주 평범한 가르침의 방향을 설정하여 전통과 현대적 불교가 서로 어우러지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들에게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주었고 고생을 경험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고생 속에서 인연복덕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두타고행(頭陀苦行)의 청빈한 생활은 신심을 기를 수 있게 해주는데 어찌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까?

대외적인 홍법 활동은 두 다리를 의지하여 대만 전역으로 몇 번에 걸쳐 수천리 길을 걸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차바퀴를 대신해 두 발로 산길 국도와 바닷가 도로를 걸어 다녔고 시골 동네 길을 누비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으로 4~5시간을 걷고 또 걷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도리어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느꼈습니다.

점차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걷는 대신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니고 혹은 기차와 버스를 타기도 했는데 초청을 받고 여러 곳에서 홍법을 하게 되면 신도가 교통수단을 준비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인력거나 삼륜 자전거를 타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자동차와 버스, 지금의 여객선, 크루즈, 비행기, 고속철도, 자기부상열차 등을 타기도 했습니다. 군종 교화를 위해서 저는 전차와 탱크, 전함, 군용기 등을 타본 적도 있습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최근 몇 년 이래로 저에게 차를 선물하겠다는 신도들이 세계 여러 곳에 있는데 특히 세계적인 명차들은 전부 저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좋은 차량을 선물하게 되면 “볼일을 보러 나가더라도 차가 긁힐까 하는 염려가 도리어 부담스러울테니 안된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어느 신도는 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차량을 불광산으로 보내왔기에 저는 이 차를 공덕주와 귀빈 접대용으로 쓰도록 사중에 건네 주었습니다.

대략 30여년 전 불광산 소유의 9인승 봉고차에 매번 시동이 걸리면 언제나 많은 사람이 따라나서려고 했습니다. 모두가 바라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중에는 그 차를 26인승 차량으로 개조를 하였는데 이상했던 것은 당시 이 차량이 도로교통국 감리소의 검사를 통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차를 여러 해 동안 쓰고 나서는 ‘폐차’를 해야만 했는데 우리들에게 공로가 큰 이 차량을 남의 손에 맡겨서 차마 고철 처리하는 방식으로 팔 수 없었기에 나중에는 불광산 한쪽 공간을 찾아서 ‘양로’하도록 배치해 보관하였습니다.

어쨌든 저는 대만 전역을 다녔고 국내외로 다니면서 온갖 교통수단을 모두 이용해보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백년불연-저의 교통공구’ 편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것을 참고하여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배를 타거나 말을 타고 나서는 길에는 생명위험이 있다(行船走馬三分命)”고 했듯이 빈승의 생명이 달리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법을 널리 펼치기 위해서는 별다르게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는가는 따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날 빈승의 의식주행은 모두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고 오늘날은 예전과 전혀 비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옷을 모두 제자들이 대신해서 마련해 주어 춘하추동 각각마다 두껍고 얇기가 다르지만 수십 년 이래로 겨울 여름을 막론하고 저는 사계절 같은 옷을 입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신도들이 저에게 옷으로 저와 인연을 맺고자 하였는데 밴쿠버 심혜(心慧) 스님이 ‘만불조의(萬佛祖衣)’ 가사를 보내왔지만 울긋불긋한 가사를 한 번 걸쳐본 이후로 저는 감히 그 가사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4~5년 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홍루몽(紅樓夢)’ 조설근(曹雪芹)의 선조들이 직무를 맡았던 강녕직조창(江寧織造廠)이었던 지금의 남경에 있는 ‘운금(雲錦) 박물관’에서 저에게 운금 가사 한 벌을 보내 왔습니다. 한국의 수행자인 정우 스님이 금란 가사를 저에게 선물하였는데 너무나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서 저는 감히 걸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선물받은 모든 가사는 불광산 보장관으로 보내 소장하도록 하였습니다.

현재 먹는 것은 여러 곳의 신도들이 계속해서 과일이나 과자 등 선물을 보내주고 있어 아주 풍족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을 제가 어찌 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저는 당뇨병을 앓은 지 40여년이 되었으니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매번 이러한 식품들을 보내오면 저는 불광산 각 부서로 보내 주어서 대중들이 골고루 맛을 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수 많은 저의 제자들과 학생들 역시 다들 빈승이어서 조금씩 나누어 주어도 다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함께 기뻐하고 나누어 먹으니 그 자체가 불광산의 수행정신입니다.

현재 저는 이미 자리에서 물러나 불광산에서는 뒷줄에 앉은 인물이라서 발우공양에서 저의 좌석이 달리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산료에 거주하면서 시자 한명이 전담하여 저를 위해 날마다 음식을 준비해 주고 있습니다. 단지 매일 제가 식사를 할 때쯤이면 수시로 십여 명에서 스무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이렇게 갑자기 사람들이 오면 시자가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의 분량을 준비해낼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자 각구(覺具) 스님은 남화대학교 석사 출신으로, 아주 총명하고 능력이 출중하여 여러 해 동안 음식을 만들면서도 전혀 조급해 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나름의 방법으로 밥 때에 찾아오는 제자들을 민망하게 만든 적이 없었습니다. 연습이 많이 되어서인지 아주 지혜롭게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합니다.

어쨌든 간에 음식에 대해서 저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달리 없기에 비록 당뇨병을 앓고 있지만 제자들에게 제가 먹도록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저에게 인간세상의 맛난 것을 묻는다면 아마도 무말랭이와 찻물을 부은 밥일 것입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은 제가 18년간 불광산 주지를 맡고난 후 두 번째 주지였던 심평 스님이 30년 전에 저를 위해서 지은 개산료라는 곳인데 마당까지 대략 300~400평 정도의 공간으로 아주 넓습니다. 나중에 이 넓은 마당을 저 혼자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느껴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전등루(傳燈樓)’라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공간인 개산료도 이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전등루 건물은 전등회, 서기실, 인간불교연구원 등 저와 관련이 있는 부서가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불광산종무위원회의 종무위원들도 간혹 이곳에서 회의를 하기도 합니다.

불광산의 모든 건축물은 다 제 것이 아니며 단지 전등루만이 제가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그것 역시 제것은 아닙니다. 왜 ‘전등(傳燈)’이라고 하였을까요? 제가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비록 제가 불광산 주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물러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스승에서 제자로 전승되는 ‘전등(傳燈)’의 관계에 있으니 저는 이곳에 마음을 아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거처하는 곳이 넓지만 빈승은 여전히 소파 한 장을 침대로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아마도 이는 빈승의 습성인 것 같습니다. 60세 생일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저를 위해서 특별히 침대를 마련해 주었지만 저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미국 ‘서래사’도 마찬가지로 저를 위해서 침대를 준비해 주었는데 어떤 모양새이던지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것이 습관이 된 저는 기꺼이 방바닥에서 잠을 잤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잠을 편안히 잘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저의 거주의 경험담입니다.

현재는 이동하는데 있어서 빈승에게는 자신만의 교통 공구가 생겼으니 더욱 편리해졌습니다. 불광산에서는 저를 위해 7~8명이 탈 수 있는 국산자동차 한 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실제적으로 매번 탑승하는 사람이 4명이 넘다보니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차 안에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원로인 자혜, 자용 스님 등도 불광산에서 중요한 소임을 맡고 있으니 현재 다들 각자 전용의 차량을 쓰고 있지만 저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제 차에는 간혹 열 명 넘게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원을 초과해 탑승하는 일도 자주 있습니다. 비록 빈승은 정원을 초과하면서 법규를 위반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이 많다보니 방법이 없어서 벌금을 내더라도 제자들의 동행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의식주행(衣食住行)에 있어서 빈승도 “나중에 돈이 생기면 이런 옷도 사고 저런 음식도 먹어봐야겠다”고 하면서 젊은 시절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제 구매능력이 있지만 입고 먹고 거주하고 이동하는 것에 있어서 따지고 싶은 생각이 일찍이 없다보니 인연 따라 간단하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빈승의 평생 철칙이자 규율이 되었던 것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08호 / 2017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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