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안경, 그 안과 밖의 시선 ② - 동은 스님
“눈은 내 마음 그대로 투영하는 마음의 창” 우리는 ‘안경’이라는 아상에 잡혀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안경 통해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단정짓지 않나? 중요한 내면의 세계 보려면 마음의 눈으로 볼때 명쾌해 안경을 쓰든지 쓰지 않든지 꽃은 늘 피고지고 아름다워
‘제 눈에 안경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거나 판단하는 시각적인 기준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안경이란 것이 그 사람에게만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이 꼈을 때는 어질어질 한 것이 당연하다. 남들이 볼 때 영 아니다 싶은 커플도 눈에 ‘안경’이라는 콩깍지가 끼면 그 사람 눈에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출가 후 안경을 쓰게 됐다. 학인시절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눈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결국 안경을 쓰게 되었다. 흐릿했던 글자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안 쓰던 안경을 쓰니 불편하고 낯설었다. 잠을 잘 때 안경을 잘못 두어 부러진 적도 있고 특히 겨울에 기온차이로 렌즈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안 보일 때의 불편함은 안경을 안 써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요즘 다초점 안경이 인기다. 안경 하나에 난시나 원시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어 안경을 꼈다 벗었다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초점이 렌즈 하나에 모여 있기 때문에 세심한 사용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난시라 안경 하나로 족했는데 어느 날 노안이 오면서 돋보기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볼 땐 돋보기를 끼고 일상생활 할 땐 다시 안경을 바꿔 끼니 보통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호불호가 팽팽한 다초점 안경을 몇 번 망설이다가 얼마 전에 하나 장만하고 말았다. 현대문명은 놀랍다. 안경 하나로 다각도의 사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0세기의 기적이란 칭호를 받는 헬렌 켈러는 세상에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큰 병을 앓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숲 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헬렌 켈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눈을 뜨고 두 귀를 열고도 본 것이 없다니···.
헬렌 켈러는 이 후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이란 글을 썼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 글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았다. 그녀가 사흘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선생님의 얼굴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후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는 것이었다. 둘째 날에는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박물관을 찾아가 인간이 진화해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한 후 저녁에는 보석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별 생각없이 늘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사람의 가치가 100이라면 그 중 눈은 70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눈으로 보는 것이 삶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눈은 육안(肉眼)이다. 중생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육신에 갖추어져 있는 감각적 눈을 말한다. 이 눈으로 사물의 형태나 빛깔을 구별하며 세상 모든 일에 잣대를 들이댄다. 잘 보이지 않으면 안경이란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눈은 종이 한 장만 가려도 사물을 바로 보지 못 하는 한계를 지닌 눈이다.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어린왕자’ 책을 보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심안(心眼)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야 잘 안보이면 안경을 쓰면 되지만 정작 중요한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면 안경으로는 안 된다. 마음의 눈으로 보려면 먼저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심안이 감겨 있는데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혹시 마음을 꿰뚫어보는 안경이라도 나온다면 아마 큰일 날 것이다. 호숫가 그림 같은 집도 알고 보면 고뇌가 있듯이, 어쩌면 육안(肉眼) 속에 아름다운 비밀 몇 개쯤 숨기고 서로의 초점을 살짝 비켜 사는 것도 삶을 좀 더 넉넉하게 사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천안제일 아나율 존자가 있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 잠에 취해 깨어나질 못했다. 부처님의 경책에 잠이 깬 아나율은 “지금부터는 몸이 문드러지더라도 결코 여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를 하였다. 이후 잠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정진을 하더니 끝내 눈이 짓물러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이 밝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껏 눈으로 볼 수 없던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다. 그 후 아나율은 선정에 들면 하늘과 땅, 온 우주는 물론 천계와 지옥까지 걸림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시력을 잃는 피나는 정진 끝에 육안과 심안을 초월한 천안(天眼)이 열린 것이다.
우리는 예부터 그 사람의 진실성을 알고자 한다면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라고 한다. 눈은 거짓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심리상태, 즉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음이 눈에 보이는가? 볼 수가 없다. 그나마 눈을 통해서 들고 나니 마음의 창인 셈이다.
요즘은 안경이 없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가끔 물건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눈이 네 개나 되는 사람이 그것도 못 보냐는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속으로는 “눈이 네 개나 되니까 이 정도라도 보고 있다”며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참는다. 나름대로의 시비분별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안경’이라는 아상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그 안경을 통해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단정 짓고 있지는 않은가? 렌즈라는 것은 크게 보이기도 하고 작게 보이기도 하며 흐리게 보이기도 하고 겹쳐 보이기도 한다. 내가 안경을 통해 보지 않아도 진실은 늘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안경을 쓰든 안 쓰든 꽃은 피고 지고 노을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기 때문이다.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508호 / 2019년 10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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