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자신을 희생해 다른 생명을 구하다
마을사람 구하려 호랑이 먹이가 되고 꿩 위해 귀를 잘라내다 굶주린 호랑이에 몸 보시한 ‘자타카’ 이야기 후대에 큰 영향 진나라 담칭 스님, 호환 시달리는 사람들 대신해 먹잇감 돼 북량 법진 스님은 가뭄에 굶주린 사람들 위해 자기 몸 보시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속성이다. 그래서 불교에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악업으로 간주한다.
2600년 전 인도사회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쳐 복을 얻으려는 제사문화가 만연했다. 희생되는 동물의 수도 적게는 한두 마리에서 많게는 수백수천 마리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이러한 희생제의로 복을 받기는커녕 다른 생명을 무참히 죽인 무거운 과보를 피해갈 수 없다고 비판했다.
불교의 생명관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자타카(본생담)’이다. 여기에는 부처님이 과거생에 사슴들의 왕이었을 때 임신한 사슴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독수리를 피해 품안에 든 비둘기를 살리려 자신의 살을 베어낸 일화들이 나온다.
‘자타카’에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보시한 태자 이야기도 실려 있다. 오랜 옛날 석가모니가 전생에 태자였을 때다. 눈이 수북이 쌓인 어느 날 태자가 골짜기 밑에서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은 어미 호랑이가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대로 두면 어미와 새끼들이 모두 죽을 게 분명했고, 이를 애처롭게 여긴 태자는 자신의 몸을 먹여 여덟 생명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태자는 높은 곳에 올라가 호랑이가 먹기 쉬운 위치를 가늠한 후 뛰어내렸다. 호랑이에게 으깨진 몸을 편히 먹이기 위해서였으며, 동시에 호랑이가 살생의 업을 짓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호랑이는 태자의 몸을 먹은 뒤 기운을 차렸고, 새끼 호랑이들도 살아날 수 있었다. ‘금광명경’과 ‘현우경’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전한다.
석가모니의 이 전생담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사신사호(捨身飼虎)’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나라 국보 보협인탑 부조에도 사신사호 장면이 새겨져 있고, 돈황 막고굴 제17굴‧제428호굴, 7세기 전반 그려진 일본 나라 호류지의 ‘사신사호도’도 널리 알려져 있다.
부처님의 전생은 모두 자비실천의 보살행이었고, 모든 생명이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뭇 생명들을 위한 권리선언이었다. 훗날 많은 출가자들은 과거 석가모니의 자비로운 마음과 행동을 따르려 애썼다. 혜교 스님이 편찬한 ‘고승전’(519년)에는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보시했던 스님들의 삶이 다수 기록돼 있다.
진(晋, 265~316)나라 담칭 스님도 그중의 한 명이다. 담칭 스님은 젊을 때부터 자비심이 넘쳐 곤충 한 마리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은 팽성의 한 마을을 지나다 병들고 굶주린 80대 노부부를 보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스님은 노부부의 머슴이 되어 여러 해를 도왔다. 비록 승복은 벗었지만 계율에는 털끝만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노인부부가 편안히 세상을 떠나자 다시 길을 나섰고, 팽성의 가산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스님은 이 마을에 호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끔찍한 얘기를 들었다. 매일 한두 사람씩 호랑이에게 물려갔고, 마을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스님은 그들에게 말했다.
“호랑이가 나를 잡아먹는다면 재앙이 당장 멈출 것입니다.”
처음 마을사람들은 스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해하다가 그 의중을 알고는 극구 말렸다.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어스름할 무렵 스님은 호랑이가 다니는 풀숲에 앉아 발원했다.
“내 이 몸으로 너의 허기짐과 목마름을 채우거라. 그런 후에 다시는 네가 원한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면 미래 세상에는 더 없는 법식(法食)을 얻게 되리라.”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자비심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자정이 넘었을 무렵 호랑이가 스님을 잡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사람들이 그 자리에 가보니 몸은 먹어치우고 머리만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스님의 유해를 모아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 그 후 신기하게도 마을에서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전생에 호랑이에게 몸을 보시했듯 담칭 스님은 호랑이를 교화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호랑이에게 던졌던 것이다.
중국 북량(397~439)의 법진 스님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줬다. 경전에 해박했던 스님은 북량의 왕 저거몽손과 그 아들들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저거몽손과 큰 아들 저거경환이 죽고 저거주가 왕위에 오르던 해였다. 전란의 시대에 극심한 가뭄까지 겹치면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법진 스님은 여러 부자들의 도움을 얻어 굶주린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부자들의 비축 식량까지 고갈돼가자 스님도 더 이상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다.
마음 아파하던 스님은 무언가 결심한 듯 깨끗이 목욕한 후 칼과 소금을 가지고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스님을 반기는 그들에게 차례로 삼귀의계를 내려준 뒤 자신의 의발을 나무에 걸어놓고 말했다.
“당신들에게 제 몸을 보시하니 부디 거절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들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차마 스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자 스님은 스스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직접 베어 건네주고 이를 먹도록 하였다. 스님이 흐느껴 우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했다.
“나의 살과 가죽을 취하면 며칠은 더 견딜 수 있을 것이오. 왕의 사신이 오면 내 남은 몸을 거둬갈 것이니 어서 갈무리하시오.”
사람들은 스님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더더욱 스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얼마 후 왕의 사신이 부랴부랴 스님을 찾아왔다. 상황을 알아챈 사신은 곧바로 스님을 가마에 싣고 궁전으로 돌아와 치료했다. 북량 왕 저거주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애통해하며 칙명으로 300석의 곡식을 풀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다음날 스님은 입적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통곡 속에 성 북쪽에서 다비식이 치러졌다. 7일 동안 치솟던 연기와 불꽃이 사그라든 후 살펴보니 시신과 뼈는 모두 타고 오직 혀만 남았다. 왕과 백성들은 그 자리에 탑과 비를 세워 스님의 고매한 원력과 자비심이 후세에 전해지도록 했다.
승부 스님은 ‘동방의 성인’이라는 도안 스님(314~385)의 제자였다. 고위 관리 아들이었던 승부 스님은 도안 스님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출가한 뒤 부지런히 경을 읽고 수행에 매진했다. 도안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스님은 위군의 정위사에 머물렀다. 당시 사찰 인근 마을에는 재물을 약탈하는 강도떼들로 민심이 흉흉했다. 어느 날 스님은 길을 걷다가 강도들에게 붙잡혀 사색이 된 아이를 보았다. 스님이 강도들에게 다가가 연유를 묻자 그 아이의 심장과 간 등 오장을 빼내려 한다고 했다. 깜짝 놀란 스님은 이내 옷을 벗고 자기와 아이를 맞바꾸자고 말했다. 강도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스님은 “어른의 오장도 쓸 수 있는가” 물었다. 강도들은 스님이 뭘 어쩌겠나 싶어 낄낄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스님은 “나의 허깨비 같은 몸은 일찍이 한번 죽었던 일이 있었는데 지금 내가 죽음으로써 사람을 살린다면 더 바랄 일이 있겠느냐”며 강도의 칼을 빼앗아 자기 가슴에 칼을 꽂고 배꼽까지 힘껏 내려 그었다. 스님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강도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서로를 책망하며 도망갔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사람이 피투성이 스님을 발견하고 집에서 바늘을 가져와 배를 꿰매고 약도 발라주었다. 스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아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고, 스님은 정위사에서 머물다 얼마 후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당 도선율사의 ‘속고승전’(645년)에도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던 고승 얘기가 여럿 소개돼 있다. 여기에는 비둘기를 살리려고 독수리에게 자신의 살을 베어준 부처님의 전생과 유사한 기록도 등장한다. 수나라 지순 스님은 일평생 부지런히 염불했던 스님으로 어느 날 사냥꾼에 쫓긴 꿩이 스님의 방안으로 날아들었다. 스님은 사냥꾼에게 꿩을 놓아주기를 거듭 요청했지만 사냥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스님은 꿩을 손에 쥐고 돌아서는 사냥꾼을 부르더니 자신의 귀를 잘라 건네며 꿩을 놓아줄 것을 다시 간곡히 부탁했다. 사냥꾼은 너무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활을 집어던지고는 스님에게 법을 청했다. 스님은 사냥꾼에게 살생의 과보가 얼마나 큰지를 들려줘 참회토록 했다. 이후로도 스님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살생의 업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스님은 또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초겨울이면 솜을 넣은 겹옷을 마련해 옥에 갇힌 죄수들을 찾아가 나눠주었다. 자신에게 엄정하고 다른 이에게 한없이 자비로웠던 스님은 평생 염불을 놓지 않았으며, 72세 되던 604년 1월20일 서방정토로 떠나갔다.
진(晋)나라 승군 스님은 오리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고승이다. 스님이 살던 곳은 나강현 곽산이란 섬이었다. 곽산 정상에는 발우처럼 움푹 팬 큼직한 바위가 있었고, 그곳에는 신선이 마신다는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그 물은 섬의 유일한 식수이기도 했다. 스님이 거주하던 암자는 발우바위와 작은 개울 사이에 있었다. 스님은 노구를 이끌고 늘 외나무다리를 건너 물을 퍼왔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물을 뜨러가다가 외나무다리에 이르렀을 때 날개가 부러진 오리 한 마리가 있었다. 지나려니 오리가 사납게 쪼아대며 저항했다. 스님은 석장을 들어 쫓으려다 행여 오리가 더 다칠까봐 그냥 발길을 돌렸다. “이 또한 인연이고 과보”라고 여긴 스님은 암자로 돌아와 세상과의 연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일체 물을 마시지 않았고 며칠 후 스스로 숨을 거뒀다. 당시 스님 나이는 140세였다고 전한다.
근래 불교계 일각에서 스님들의 육식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범망경’ ‘능엄경’ ‘능가경’ 등에 살생과 육식은 돌이킬 수 없는 악업이자 윤회의 족쇄라고 설하고 있다. 심지어 ‘입능가경’에서는 “육식은 자비종자를 끊는 일”이라고까지 엄중 경고하고 있다. 호랑이를 교화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보시하고, 꿩 한 마리를 위해 귀를 잘라낸 옛 스님들이 안다면 까무러칠 일 아닌가.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82호 / 2021년 4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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