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우주를 담은 화가 전성우 : 그의 만다라 읽기
거시 우주와 미시 세포가 하나의 원리임을 일깨워 만다라가 과거의 정해진 틀에 따라서만 그려질 필요없어 우주 관조하고 마음 비춰 내면화된 모습을 그대로 담은 듯 미국 유학서 만다라 접해 …연구 통해 자신의 우주로 재해석
우송 전성우(雨松, 全晟雨, 1934~2018) 화백은 ‘만다라 화가’로 불릴 만큼 만다라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다. 만다라라고 하면 티베트에서 비롯한 기하학적이고 도안적인 그림이 떠오르기 때문에 언뜻 그의 작품은 제목만 만다라일 뿐 그것이 실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불교회화의 만다라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만다라(Mandala)’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만달(Mandal)’은 본질을 뜻하고 ‘라(la)’는 소유를 의미해 ‘본질을 취하는 것’ ‘본질을 담아내는 것’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림으로서의 만다라를 떠올리지만, 원래는 특수한 목적에 따라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여러 존상을 배치하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 불교에서의 마법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다라니집경’은 불법에 의한 영험한 주문, 즉 ‘다라니’를 집대성한 경전인데 가장 대표적인 다라니는 ‘반야심경’의 끝을 장식하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같은 것이다. 이 ‘다라니집경’을 읽어보면 ‘반야심경’의 다라니처럼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는 것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얻고자 할 때는 상황에 따라 주문에 맞는 불단을 만들고 주문을 외워야 더 강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치하는 단이 바로 만다라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평면의 그림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 우리가 더 친숙하게 알고 있는 회화로서의 만다라다.
이러한 만다라가 왜 ‘본질을 취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여기서 본질은 ‘깨달음’이고 이를 얻는 것, 취하는 것은 곧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니, 결국은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어떤 도구로서의 만다라가 된다. 이것은 마치 전파를 수신하는 안테나와 같다. 장소에 따라 안테나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파가 잘 잡히기도, 안 잡히기도 한다. 주문이 마법같은 효험을 얻기 위해서는 공기 중의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끌어들여 목적한 곳에 집중시켜야 하는데, 만다라가 바로 그런 우리 주변의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안테나인 셈이다. 따라서 전파를 잘 잡기 위해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처럼 나의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형태로 불단을 배치함으로써 깨달음의 지혜, 혹은 에너지를 수신한다는 원리다.
불교미술에서의 만다라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우리 주변의, 대기의, 나아가 우주의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우주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형상화한다.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를 걸어놓으면 이를 보고 혼백이 찾아오는 원리와 유사하다. 우주를 그려놓으면 우주가 깃드는 셈이다. 그래서 만다라는 불교적 우주관의 압축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불교의 사상가들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자면 만다라가 꼭 과거의 정해진 틀에 따라서만 그려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라디오를 들을 때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주파수가 있는 것처럼, 내게 어떤 기운이 깃들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그것을 시각화하면 그것이 만다라가 되는 것이 아닐까. 전성우의 만다라는 그런 생각을 담아낸 만다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과학의 시대인 현대사회에 어울리게 그의 만다라는 실제로 우주를 닮았다. 그러나 그의 만다라는 단순히 별이나 성운이나 은하계를 그린 우주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그보다는 우주를 관조하고 그 우주가 내 마음에 비춰지면서 내면화된 우주를 그대로 담아낸 것 같다. 때문에 그의 만다라는 망원경으로 바라본 우주가 아니라 현미경으로 바라본 우주이다. 태양계 주변으로는 행성이 돌고, 양성자 주변으로는 전자가 돈다.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의 만다라에서는 지극히 큰 것이나 지극히 작은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 그는 우주를 보기 위해 하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만다라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익히 아시겠지만, 그의 부친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다. 그러한 배경 덕분인지 일찍이 1950년대에 유학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 석사는 캘리포니아의 밀스 대학에서 밟았는데, 이때 밀스 대학에 만다라 컬렉션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지도교수의 권고로 정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다라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단순히 만다라의 시각적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고전적 만다라를 모티프로 그림을 그리는데 그쳤던 것이 아니라 만다라가 지닌 우주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우주로 재해석한 것에는 깊이있는 만다라에 대한 자신만의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미술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 간송의 수집품들과 그 주변에 모였던 많은 지식인들과의 교감과 교류는 그의 생각과 감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중 비교적 전통적인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작품을 굳이 찾자면 ‘색동만다라’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비근한 비교일지도 모르겠으나 사진에 보이는 만다라는 일본 토지(東寺)에 소장된 양계만다라 중에서 금강계만다라의 동북단에 위치한 ‘항삼세삼매야회’의 테두리에 있는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화가가 밀교도상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런 작은 부분까지 보았을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만다라에 대한 애착을 생각해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의 현미경적인 고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마도 단청의 오방색과 더불어 그에게는 그의 내면에 있는 화가로서의 색에 대한 본능을 일깨운 만다라였을 것이다.
이에 반해 ‘공간만다라’는 마치 우주의 성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생명의 세포를 보는 느낌을 준다. 거시의 우주와 미시의 세포가 사실은 하나의 원리임을 알려주는 만다라이다. 세포는 우주처럼 거대해지고, 우주는 세포처럼 생명으로 변한다. 불교에서는 모래알 하나에도 불성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전성우 화백은 그렇게 우리 세포 안에 숨어있는 불성을 찾아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84호 / 2021년 5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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