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비올렌 르루아의 ‘바람의 우아니’

아무 얘기도 할 필요 없는 날은 올까? 사라진 신비 마을 이야기 담은 비밀의 돌 가득 갖고 돌아올 때 ‘내려놓아도 된다’는 바람의 말 언어 의존 벗어난 자유 일러줘

2021-05-11     박사
‘바람의 우아니’

이것은 나의 이야기. ‘나’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나는 산 아래 골짜기에서 산다. 자라는 동안 나는 산꼭대기의 신비로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마을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마을을 찾아 올라가지만,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안개로 덮이거나 바위에 가려져 순식간에 없어진다. 그 신비로운 마을을 찾기 위해 나는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러다 문득 길을 잃었구나 싶었을 때, 작은 돌 하나를 발견한다. 

그 돌은 신비로운 마을에 사는 이들의 신호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자신의 마을에 간다. 그 마을에서 함께 지내지만,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물어보려 하면 가만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내 주머니에 비밀의 돌을 하나 넣는다. 주머니는 점점 무거워진다. 

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 지혜로운 여인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던 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장엄한 풍경, 추위, 낯선 배, 낮과 밤, 새벽, 목소리, 바람소리, 바람의 목소리. 마을로 돌아온 나는 생각한다. “바람의 말을 알아듣게 된 우리는 훌쩍 자란 것 같았다.”

마을을 떠나는 나는 “얼른 돌아가서 내가 보고 들은 것과 사라진 마을, 눈 덮인 배들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며 서두른다. 그러다 문득, 비밀의 돌이 가득 담긴 주머니가 무겁게 느껴진다. 바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에 비밀을 내려놓아도 된단다. 그러면 넌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지. 이곳에 대해 떠도는 숱한 이야기들 위로 너는 바람처럼 날 수 있게 될 거야.” 

말은 어렵다. 무엇을 설명하려하든 말로 하려고 하면 늘 불충분하다. 둘이 아닌 세상을 둘로 나누고 상이 없는 곳에 상을 세운다. 개구즉착. 말하는 순간 틀린 말이 된다는 스승들의 경고는 엄중하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말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불교의 스승들이 팔만사천경전을 써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수히 많은 손가락이 달을 가리킨다. 저 손들을 따라가다 보면 달에 가 닿으리라. 그러나 그 손을 훌쩍 뛰어넘어, 그 손에서 시선을 떼어 저 멀리 던져야 비로소 달이 보인다.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전법을 망설인 이유다. “내가 성취한 이 교리는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따르기에 아주 난해하다.(…) 나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이면서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도리어 성가신 일이 될 것이고 나에겐 곤혹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붓다연대기’ 중에서)라는 부처님의 고뇌에는 진리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 또한 “떠도는 숱한 이야기들 위로 바람처럼 날 수”있었다. 언어의 가능성과 언어의 한계를 모두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전법의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우아니(Uani)”는 이누이트어로 ‘저 멀리’라는 뜻을 가진다고 한다. 이 낯선 단어를 들으며 ‘반야심경’의 진언을 떠올린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바하(gate gate pragate prasam.gate bodhi svh)”에서 ‘가떼(gate)’는 가버린 것, ‘빠라가떼(pragate)’는 아주 먼 저 곳까지 가버린 것, ‘빠라상가떼(prasam.gate)’는 완전히 저 먼 피안의 세계에 가버린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곳과 저곳, 그리고 저 먼 곳이 나뉘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사라진 신비로운 마을’이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의 비유를 빌리자면, 언어는 돌일 것이다. 언어가 없었다면 길을 찾을 수 없겠지만 언어에 의존하다보면 진리의 바람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없다. 강을 건넌 이가 뗏목을 버리듯 주머니의 돌을 버려야 할 때를 생각한다.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는 날이 과연 올까.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85호 / 2021년 5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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