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장 프랑수아 샤바의 ‘꽃들의 말’

모든 마음 내려놓고 눈앞 꽃을 보라  아름다운 꽃 ‘모브’의 궤적 통해 고통이 생멸하는 과정 보게 돼 고통은 고정관념·편견에서 탄생 이 관념을 여읜 상태가 곧 열반

2021-07-19     박사
‘꽃들의 말’

나이가 들면 꽃 사진을 찍게 된다지만, 나이 탓 만이겠는가. 꽃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동적으로 사람을 제 앞으로 데려다놓는 힘이 있다. 정교한 꽃잎과 화려한 색, 거기에 향기까지 더하면 누가 꽃을 이길 것인가. 꽃 앞에 서면 이기고 지려는 마음도 스러진다. 존재만으로도 고마울 밖에. 

장 프랑수아 샤바가 쓴 짧은 글 세 편에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덧붙인 이 아름다운 책은 G.W 게스만이 1899년에 쓴 ‘꽃의 언어’에 나온 꽃말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꽃말은 오래 전부터 꽃을 받는 사람에게 은근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한두 줄의 간략한 꽃말에서 끌어낸 이 아름다운 글은 읽는 이에게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첫 에피소드인 ‘자줏빛 꽃’의 배경은 튤립파동이 일어났던 17세기 네델란드다. 귀한 튤립이 턱없이 비싼 값에 팔리던 시절이었다. 식물학자인 에라스무스는 “몹시 경이롭고 가장 아름다운 튤립”인 모브를 탄생시켰다.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값조차도 매길 수 없는 꽃. 사람들은 모브 앞에서 전율한다. 공포감마저 느낀다. 

순진한 연구자의 마음으로 모브를 만들어낸 노학자 에라스무스는 꽃을 공개한 날 이후 뜻하지 않게 쫓기게 된다. 도둑이 온실 문을 부수고 튤립 구근 다섯 상자를 훔쳐간 사건의 충격으로 에라스무스는 집을 포기하고 모브를 들고 떠난다. 간신히 머물게 된 친구의 집에서도 친구의 눈에 이글거리는 탐욕을 본 뒤 더이상 머물지 못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비참하고 초췌한 몰골로 꽃을 품에 안은 채 떠돌던 에라스무스는 이 꽃에 악이 깃들어있다고 확신하고 모브를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바다에 꽃을 버리려다가 차마 못 버리고 작은 숲속 한 가운데 빈터에 모브를 심어두고 떠난다. 그리고 살던 마을로 돌아와 다시 평범하고 외로운 노인이 되어 돈이 되지 않는 장미를 가꾸며 산다. 

그로부터 한참 후, 젊은 연인은 숲속을 거닐다가 꽃 한송이를 발견한다. 남자는 꽃을 꺾어 여자의 손에 쥐어주고, 사랑에 빠진 연인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배를 얻은 듯 감동하며 행복해한다. 그리하여, 해피엔딩.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꽃은 마음이 없다. 꽃은 초연하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어떠한 의견도 의도도 없다. 그러나 모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수한 생각이 오고간다. 어떤 이들은 개입할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에 무서움을 느끼고, 어떤 이들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품고, 어떤 이는 음흉한 마음을 읽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안에서 꿈같은 사랑을 발견한다. 

꽃만 그럴 것인가.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물에 내 마음을 투영한다. 입도 없는 것들, 의도도 없는 것들 속에서 나를 향한 악의를 발견했노라고 믿고 애써 앞뒤 이야기를 지어낸다. 지레짐작과 고정관념, 편견과 성급한 단정.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대부분 이렇게 탄생한다. 

부처님은 여실지견을 말하셨다. 생각과 관념의 감옥에 갇혀 끊임없이 고통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셨다. 그 모든 것이 무명에서 기인함을 가리키셨다. 아름다운 꽃 ‘모브’의 궤적을 보며, 우리는 그 모든 쓸모없는 고통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다가 사라지는지 본다. 그저 부지런히 물을 빨아올려 제 생명을 맘껏 피워낸 꽃 한송이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던 생각이 만드는 고통을 본다. 

꽃말은 그 뜻을 알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편지와 같지만, 모르고 보면 그저 아름다운 꽃 한송이일 뿐이다. 소소한 재미로는 괜찮지만 그것을 넘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때 꽃은 제 빛을 잃는다. 모든 마음을 내려놓고 눈앞의 꽃 한송이를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관념을 여읜 상태가 곧 열반이라고.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94호 / 2021년 7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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