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한국 가톨릭의 정교유착

장면 정권 출범에 가톨릭 신자들 요직 급증 장면 총리, 해방 이후 가톨릭 지원으로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 “정교분리 헌법보다 교회 우선” 가톨릭, 정부 요직 인선 착수 정부요직에 가톨릭 신자 4배 증가…불교 비중 상대적으로 감소

2021-07-26     이병두
노기남 주교.

1960년 3월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학생 시위에서 촉발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12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내각제 개헌을 거쳐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내각 수반인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나라 안과 밖의 기대와 우려 속에 취임한 장면은 정치 기반이 취약한 데다 성격이 나약하여 어려운 시기를 이끌어갈 지도자감이 아니었다. 이는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를 수습할 엄두도 내지 않고 도망쳐 수녀원에 몸을 숨겼던 것으로도 확인된다.

장면은 해방 전 동성상업학교 등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이 이력의 전부였는데, 한때 예수 성심신학교(聖心神學敎)에서 그에게 영어와 신학을 배운 제자인 노기남이 한국인 최초로 주교가 되어 그 인연으로 해방 이후 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거물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미군 장성, 장면(맨 왼쪽) 등과 이승만을 방문한 노기남 주교(오른쪽에서 두 번째)(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홈페이지).

가톨릭의 추천으로 미군정 시절 민주의원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내고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여러 차례 UN 총회 한국대표단 수석대표와 대통령 바티칸특사·초대 주미대사 등 외교 분야에서도 요직을 거쳤다. 그뒤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정치 거물로 성장하였으나, 이승만과 갈등이 커지면서 민주당 쪽으로 옮겼고, 1956년에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신익희 대통령후보와 함께 부통령 후보로 나서 당선되었지만 그것은 아무 힘도 없는 자리를 지킨 것 뿐이다.

어쨌든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새로 제2공화국이 성립되고 1960년 8월 가톨릭 신자 장면을 내각 수반[국무총리]으로 한 정권이 탄생할 때 전국의 가톨릭 신자는 45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전체 가톨릭을 대표하는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시보’(1960년 8월28일)의 사설 부제를 “모든 종교에 대한 무차별주의는 옳은가?”로 하였을 뿐 아니라 진한 글씨로 “이 나라의 가톨릭 신자인 정치가는 언제나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정치보다 더 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사설 본문에서는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나 교회 활동의 협조는 천주교회를 위하는 데만 국한된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가톨릭의 이익을 위해서는 헌법에서 정한 정교분리를 무시해야 한다는 위험한 주장까지 펼쳤다. 기관지 사설에서 이처럼 장면 정권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을 드러내게 된 데에는, 이승만 정권 출범 초기 장면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다 그 사이가 벌어지면서부터 그것이 정권과 교회와의 갈등으로 확대되고 결국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대구매일신문’이 테러를 당하고 ‘경향신문’은 폐간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한(恨)’을 풀어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가톨릭교회와 신자들의 이런 기대를 장면이 저버리지 않았음은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 시절 주요 정치지도자의 종교 분포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유당 시절에는 ‘개신교 39.2%, 가톨릭 7.4%, 불교 16.2% …’이었다가, 민주당 시절에는 ‘개신교 19.8%, 가톨릭 11.9%, 불교 7.0% …’로 가톨릭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개신교 비중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전체 국민 대비 신자 비율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편이었고, 가톨릭은 총인구 대비 신자 비율의 4.1배였다. 5‧16쿠데타로 내각 수반인 국무총리 자리를 채 9개월도 지키지 못했던 장면이 가톨릭교회의 요구를 현실에 반영하려고 애쓴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불교인의 비중은 자유당 시절의 16.2%보다도 훨씬 더 낮아져 7%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지만, 혹 장면 정권이 몇 년 지속되었더라면 정부 고위 인사 등용에서 이승만의 개신교 특혜에 못지않은 가톨릭 특혜를 펼치고 불교인들은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장면의 공보비서관이었던 송원영 등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개인 사무실이었던 경향신문사 고문실에서 민주당 창당과 선거 대책 논의가 이루어졌고, 장면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되는 사장 한창우가 장면 정권의 요직 인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난 데다, “장면 정부의 가장 큰 자금원은 가톨릭교회”였던 점을 들 수 있다.(김재득, ‘미군정기-장면 정부, 종교정책 변동과 가톨릭교회: 법·제도 및 정부 개입을 중심으로’) 그리고 총리 당선 직후에 노기남 주교가 “교우들은 일치단결하여 … 임무를 다하도록 기구(祈求)와 희생을 아끼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하고 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 9월호 논설에서는 ‘법 안에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자유의 남용’을 비판하는 등 노골적으로 힘을 실어주려고 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1952년 경무대를 방문한 교왕청 대표(추기경)에게 건국훈장 수여 후 기념사진(이승만 왼쪽이 국무총리 장면, 맨 오른쪽이 노기남).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헌법이 정한 ‘정교분리’ 원칙을 어겨야 한다고 총리에게 요구할 정도로 정치와 밀접하게 지내온 것이 가톨릭의 역사였고, 이런 관례는 1945년 미군정 출발시점에서부터 이 땅에서도 뿌리를 내렸다. 미군 진주 직후 노기남 주교가 ‘군정 측에 협력할 가톨릭 지도자 명단’을 추천하였고, 9월26일에는 명동성당에서 가톨릭 신자인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이 참석한 가운데 ‘미군 장병 환영식’을 열었다. 그리고 당시 미군 군종사령관 겸 뉴욕 교구장이었던 스펠만 대주교가 9월8일 미군과 함께 입국하여 한국교회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일제강점기 한때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추방당한 뒤 해방 후 초대 교왕 사절로 입국한 번 주교도 ‘미군정과 가톨릭교회’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감사로 한국 가톨릭에서는 ‘경향신문’을 통해 미군정에 대하여 일관된 지지입장을 지켰다.
 

프랜시스 조지프 스펠먼. 1945년 당시 미국 뉴욕대교구장 겸 미군 군종감.

훗날 갈등이 커져서 결별하게 되지만, 이승만에게 장면을 소개한 것도 노기남 주교였다.(노기남, ‘거룩한 평신도 장요안’) 이승만이 제헌의원 선거(5‧10선거) 당시 자신이 출마하려던 지역구를 장면에게 양보하고, 정권 출범 후에는 주UN·주미 대사와 국무총리 등 요직에 계속 중용하였던 것도, 1945년 귀국 이후 주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등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노기남 주교가 그 배경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 초반에 적극 지지하고, 가톨릭 신자 장면 정권 출범을 마치 가톨릭 정부 수립처럼 받아들이며 적극 지원한 덕분으로 당시 신자 비율에 비하여 몇 배가 되는 가톨릭 신자가 고위 인사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결국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95호 / 2021년 7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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