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 관한 불교적 비전(2): 무아와 사회정의
‘나는 공동체 내에서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제약없는 공정성 보장코자 ‘무지의 베일’ 설정한 롤스의 정의론 도덕·종교에 무관심한 경향 보여 불교와는 관련 없어 보이지만 사회정의 관한 불교적인 비전과 이론적 틀 세우는 단초 제공해
참여불교는 서양의 침탈과 피식민 경험 그리고 전쟁·가난·불평등 등과 같은 현실 인식에 기반하고 있지만, 사회적 참여를 위한 불교적 관점의 이론적 틀을 제공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참여불교인들의 나이브(naive)한 현실 인식이나 사회과학적 지식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내면적 변화를 통해서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종교로서 불교가 갖는 고유한 특성에 기인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불교에만 해당하는 독특한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는 개인의 구원과 사회 참여의 요구들을 조화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인식 하에 나는 불교의 핵심 개념인 ‘무아’가 개인적 구원이라는 불교의 주요 목표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인 사회정의 이론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오늘날 사회정의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이론과 불교의 무아론을 비교하고, 상호교차적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무아가 어떻게 현대사회에 적합한 사회정의론을 위한 불교의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고자하며 또 무아의 개념이 ‘개인의 구원과 사회적 참여를 동시적으로’---불교의 전통적 술어로 말한다면 ‘자타일시성불’(自他一時成佛)을 가능케 하는 연결고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자문(自問)해본다. 2500여년 전에 살았던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현대사회의 필요에 적합한 사회윤리 이론이 될 만한 잠재력이 있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가?
먼저 이 질문을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작업과 관련해서 고려해보자. 롤스가 그의 대표작인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보여주는 사회정의에 관한 기획은 붓다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롤스의 이론은 비록 사회정의를 달성하기 위해 기획되었지만 명백히 도덕에 무관심한 경향을 띄고 있다. 롤스는 개인의 특정한 도덕적 성향을 가정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이론의 도덕적 관념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적이거나 종교적인 권위에 기대고 있지 않다.
롤스의 이론은 어떻게 사회정의가 개개인의 이익을 바탕으로 세워질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개인의 행동보다는 그 행동을 규제하는 사회제도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그 설명하는 힘과 설득력에 있어서, 그의 이론은 서구 합리성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롤스식의 이성적이며 사회공학적인 기획으로부터 사회정의에 관한 불교적 비전을 끌어낼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롤스의 이론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사회정의 이론들은 개인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를 정당화하고 보장하려는 의도와 함께 시작한다. 경제적 인간(homo econo micus)과 같은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출되고, 또 자본주의 사회를 지지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 서구전통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롤스의 사회정의론의 배경이 되는 개인과 사회는 곧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그러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의미한다. 롤스에 있어서 정의란 선험적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조건이다.
롤스에 의하면 비록 사회가 상호 이익을 위한 협동적인 투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전형적으로 이익들의 동일성 뿐 아니라 이익들 간의 갈등으로 특징지어 진다(롤스 1971, 126). 고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이익의 배분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적 합의들 중에서 선택을 가능케 하고 타당한 분배적 몫에 관한 합의를 만들기 위한 원칙이 필요하다(롤스 1971, 126).
한편 이 원칙들의 공정함은 이 원칙들이 도출되고, 동의될 수 있는 과정의 공정함에 달려있음을 롤스는 인지하고 있다. 이 과정의 공정함을 보장하기 위해서 롤스는 원칙들을 도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위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것을 가정했다. 그의 이상적인 결정권자들은 멋대로의 우연성이나 사회적 강제의 상대적인 균형”의 제약을 받지 않음을 의미 한다 (롤스 1971, 120).
롤스는 ‘제약의 없음’을 보장하기 위해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설정한다. 무지의 베일이란 롤스의 결정권자들이 그들이 설계하는 사회에서 그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뜻한다. 그들은 교육을 잘 받을 수도 있고, 잘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은 재능이 있거나 둔할 수도 있으며, 경쟁하기에 유리하도록 잘 무장되어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사회 영역에서 그들의 경쟁적 잠재 능력에 관한 이러한 불확실성은 가정상의 결정권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덜 경쟁력이 있는 사회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모든 이에게 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사심 없는 규칙들에 도달하게 할 것이라고 롤스는 믿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무지의 베일 때문에 공정함에 관한 가장 강력한 동기는 ‘나는 공동체 내에서 누구라도 될 수 있다’(I could be anyone in the community)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방법론에 관련해서 롤스의 사회정의론은 윤리학적 구조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철학의 전통, 특히 칸트에 의존하면서도 롤스는 엄격한 경험주의의 범위 내에서 일련의 윤리학적 가정들을 발전시킨다.
이상과 같은 롤스의 일련의 작업은 사회정의에 관한 불교적 비전의 이론적 틀을 세우는데 흥미로운 힌트들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그것은 물론 불교적 관점이 롤스의 이론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서양철학자의 작업은 불교의 시간을 초월한, 존재론적인 관심들을 사회적 상호작용의 현상적인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는 흥미로운 방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롤스의 작업은 불교 내에서 개인의 본성과 개인적 깨달음에 대한 강조―존재론적 관심―와 사회에서 불교 수행자의 일상적 행동들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할 필요성―현상적 관심―과의 관계를 명백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95호 / 2021년 7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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