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사라(Sarah)보살로부터 배운 부지런함의 의미
미네소타에서 만난 푸른 눈 금발의 백인 보살 빠듯한 유학생 형편이라 큰 임금 주지 못한 ‘베이비시터’였지만 매순간 최선 다하고 어려운 부탁에 기꺼이 마음 냈던 사라에게 ‘직업은 신이 준 소명’이라는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윤리 경험해
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다녔다. 근 20년 동안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자의타의로 일요일도 없이 휴가도 반납하며 일하고 또 일했다. 나도 한국인이 가장 부지런하다고 믿었다. 유학길에 올라 가끔 접촉한 대학 밖, 보통 미국인과의 경험은 이 믿음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다가 교직을 얻어 미네소타로 이사 온 다음 아내가 쌍둥이를 출산하면서 미국인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내 믿음을 바꾸었다. 우리 한국인은 생각만큼 부지런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조교수였고 쌍둥이를 출산한 아내는 휴학 중인 대학원생이었다. 수입이 빠듯했다. 일가친척 한 명 없이 인구의 97%가 백인인 도시에 살다보니 ‘의지할 곳’ 하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7개월이었을 때 내가 재직한 대학에 베이비시터 광고를 냈다. 며칠 후 푸른 눈의 날씬한 20세 금발 여학생 사라(Sarah)가 찾아와 자신도 쌍둥이 남동생들이 있다며 일을 맡고 싶다고 했다. 얼마를 지불해야 할지 몰라 사라가 당시 아르바이트 직장에서 받는 돈보다 조금 더 주겠다고 했다. 최저 임금보다 겨우 조금 많은 액수였지만, 이 여대생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첫 날부터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일단 아이들을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좋아했고, 곧 자기는 아이를 최소한 넷은 낳겠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셋을 낳았다.^^) 사라는 3년 가까이 우리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언제나 일할 시간보다 15분 먼저 왔고, 온다는 날 안 온 적이 없으며, 한 번도 1분이라도 시간을 채우지 않고 간 적이 없다. 어떤 일도 두 번 지시할 필요가 없었고, 우리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다. 일하는 시간 동안은 전화를 받거나 걸지 않았고, 우리가 건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언제나 밝게 웃었고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8시간이나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8시간 내내 아이들과 신나게 시끄럽게 노느라고 우리가 공부를 못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에게 옮길까봐 독감 예방주사를 맞기 시작했고, 침이 묻었을지 모른다고 매일 장난감을 광이 나도록 닦았다. 아이들 낮잠 시간에는 우리가 지쳐서 못한 방 청소와 빨래도 해 주었다. 베이비시터 일은 아니었지만 힘들어하는 우리를 보고 추가보수 없이 기꺼이 도와주었다. 우리 일 이전에는 어느 큰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했는데, 일주일에 이틀씩 하루 8시간 동안 앉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18개월을 일했다고 한다, 최저 임금부터 시작하면서. 그렇다고 이 학생이 일에 지쳐 공부는 안했을까? 그렇지 않다,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그 이후에 생겼다.
사라가 우리를 위해 1년 일했을 때 아이들 엄마가 대학원에 복학하게 되었다. 나는 2년간 휴직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를 지원하려고 미네소타에서 1500마일(2400km)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로 함께 내려갔다. 풍토가 다른 곳에서 대학원생 아내를 지원하며 18개월짜리 쌍둥이를 키운 첫 1년은 힘들었다. 그래서 대학졸업예정이던 사라에게 노스캐롤라이나로 내려와 1년 동안 아이들을 돌봐 주겠냐고 제의했다. 그리고는 가족과 상의하라며 두 달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람에게 아이들 보모(nanny)일로 타향으로 가자고 제의하기 미안했지만, 우리는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두 달 후 사라는 우리를 따라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뿐 아니라 지금의 남편이고 당시 남자친구였던 데이브까지 함께 왔다. 사라가 한국에서 온 교수의 쌍둥이를 돌보겠다며 둘이 각자의 차에 이삿짐을 가득 실고 고향을 떠나 1500마일을 운전해 우리를 도우려 왔다. 최소한의 보수밖에 못 주었는데도 그리했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복이 많다. 사라가 아이들을 일주일에 40시간씩 돌보아 주는 동안 엄마는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고 시험들을 통과했으며 나는 처음으로 불교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사라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고마운 일을 사라는 20세에서 22세 사이에 해 주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어린, 푸른 눈의 금발 백인 보살도 있나 보다.
우리는 2005년에 미네소타로 돌아왔지만, 사라와 데이브는 노스캐롤라이나에 남아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데이브는 경영학석사까지 받았다. 그리고는 2010년에 그들의 고향으로 멋진 직장들을 잡아 금의환향했다. 지금 두 사람은 30대 후반인데, 아들 하나 딸 둘 낳아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자기들의 성공이 우리가 노스캐롤라이나로 데려가 주어 넓은 세상에서 좋은 직장부터 시작할 기회를 주어서였다면서 우리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건실한 청춘남녀를 보잘 것 없는 보수를 주며 이역만리 노스캐롤라이나로 데려가 혹시 이들이 미래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걱정했다.
그러나 미국인은 빈말을 안 한다. 사라와 데이브의 결혼식에서 양가의 모든 친척이 우리를 반기고 환대한 것으로부터 이 두 사람이 우리와의 인연에 감사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라에게 부탁한 것이었고, 자신들의 성공은 스스로 건실하고 유능해서 가능했던 것인데,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하다니. 우리는 그 이후로 그들이 이사하거나 아이를 출산할 때마다 축하한다며 오래 전에 형편이 안 되어 못 주었던 ‘밀린’ 보수를 보너스까지 더해서 주었다. 물론 사라와 데이브는 좀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서로 동의한 내용으로 계약했고 우리가 그 계약을 모두 이행했는데, 거의 10년이 지나서 예상치 못한 돈을 받는다는 것은 미국식이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 불자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사라보살과의 인연 이후 나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에 대해 새로 생각하게 되었다. 막스 베버가 말했던 자본주의의 기원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를 직접 철저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는 것은 본 적 없지만 사라는 루터교 계통의 개신교도였는데, 20대 초반의 사라가 보여 준 직업윤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북유럽 지역의 개신교도는 직업을 신이 준 소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이주해 사는 미국 중서부 북부에는 지금도 그 문화가 살아있다. 흉볼 것 많은 미국이지만 배울 것 많은 사람이 어디에나 있어서 아직도 미국이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96호 / 2021년 8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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