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 관한 불교적 비전(3): 보살도와 무아

‘자타카’ 보살, 전생 일화 아니라 실천할 예시 불교의 무아설, 롤스가 제시한 사회정의이론 시작점 될 수 있어 공동체서 누구라도 될 수 있다면 동시에 내가 모든 이이기도 해 추구하는 목표는 다르지만 세간사와 무관치 않았던 것이 불교

2021-08-17     조성태 교수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Boro budur)의 제1회랑의 사사 자타카(Sasa Jātaka).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롤스의 사회정의론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도덕 무관심적인 이성주의는 불교의 세계관이나 윤리관과는 대단히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을 더 진전시켜 보면 놀라운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내에서의 개인의 위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무아설은 ‘사회적 동력’ 즉 자아에 대한 확장된 해석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무아설을 상즉상입(相卽相入, mutual penetration)하는 연기적 관점에서 보자면 각각의 자아는 다른 모든 자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것은 롤스와의 재미있는 교차점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만약 가정상의 ‘무지의 베일’과 ‘내가 공동체 내에서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롤즈의 공정성 개념의 시작점이라면, 불교는 무아설 내에서 놀라운 대응물을 제공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공동체 내에서 모든 이이다’(I am everybody in the community)라는 개념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롤스가 제시한 이론만큼이나 설득력 있는 합리적인 사회정의이론을 위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취되기 위해서 불교는 경전들과 전통적인 교설들--자아의 변화와 개인의 깨달음을 향한 개인적 노력에 중점을 두는--전통적인 존재론적 담론에서 벗어나서 사회적 영역에서 현상적 담론--정치·경제·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행하는 관점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실제로 무아설 그리고 ‘나는 공동체 내에서 모든 이이다’라는 개념은 존재론적 영역의 불교담론을 현상적 영역의 담론으로 전환하는 이론적 통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교 사회정의 모델이 앞으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서 어떤 형태의 모델이 되든지 간에, 그것과 롤스의 사회정의 모델과의 차이점은 클 것이다. 미리 예측해본다면 불교의 모델은 사회 제도들 보다는 개인의 행동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둘 것이다. 특히 불교 모델은 자비심과 같은 개인의 도덕적 자질을 많이 강조할 것인데, 그 자질들은 깨달음을 얻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실제로 이 점은 롤스식의 이성적 사회공학과 불교적 사회정의론의 결정적이며, 피할 수 없는 차이점일 것이다. 롤스에게 있어서, 사회정의의 달성은 그 자체로 목표이며, 그의 철학적 관심은 거기서 멈춘다. 사회정의가 달성되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진다. 불교의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에 대한 최종적 추구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불교에 있어서, 사회정의에 관한 관심은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추구와 통해야 한다. 무아설은 존재론적 담론에서 현상적 담론으로 옮겨가는 이론적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입구이자 동시에 출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정의의 현상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결국 깨달음의 추구로 이어져야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아의 개념은 외형상으로 대립되는 목표들인 사회정의와 개인의 깨달음을 연결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하의 글에서는 고통의 문제, 고통의 치유, 그리고 보살의 이상(理想)과 같은 사상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사회정의와 개인의 깨달음의 추구가 서로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불교에서, 영적 성숙은 자주 고통의 치유에 비유된다. 사성제의 첫 번째 메시지는 ‘인생은 고(苦)’라는 사실에 관해서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고(苦)는 적절한 치료법이 사용되면 치유될 수 있다. 고(苦)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망들에서 기인한다. 그 욕망들은 자주 ‘갈애’로 표현되는데, 이는 그 욕망들의 맹목적이고 맹렬한 추진력을 잘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의 일반적인 맹목적 성향 때문에 인간 고(苦)의 근원적 병을 야기 시키는 이 ‘갈애’는 종종 무지(無智)와 동일시된다. 다른 모든 병들은 이 근원적 무지의 증상들이다. 주요 증상은 외부 대상에 대한 집착과, 자신 내부의 무엇, 소위 자아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집착이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 부처님은 그에 대한 치료가 가능함을 설하였다. 부처님은 깨달음 혹은 고(苦)를 대체할 수 있는 행복이 각 개인에게 내재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요컨대 우리 내부의 근원적 병을 치유함으로써 행복이 성취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앞의 연재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불교전통이 제대로 된 사회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자리(自利) 혹은 깨달음의 추구와 같은 ‘자기 돌봄’에 대한 불교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정치적 이데올로기화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은 스스로 제자들을 찾아 그들이 당신과 같은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것을 재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라! 비구들이여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법을 설하라.” 

초기 불교인들은 이 구절을 붓다가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이들을 위하여 노력하라고 시킨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먼저 깨달아야 하고 고로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요컨대 ‘스스로 아픈 자는 남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결국 불교인들이 자기치유(自利)에 몰두하느라, ‘세상의 문제’에 소극적으로 되어버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불교가 개인을 넘어선 세상사의 영역에 무관심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다. 스스로 아픈 자는 남을 치유할 수 없다는 초기의 믿음은 보살의 이상(理想)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보살의 이상은 대승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이해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 새로운 종교적 상징인, 보살은 대승불교가 등장할 당시의 새로운 사회적·종교적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불교전통에서 보살이란 ‘붓다 후보자’로서 붓다의 전생을 의미하였다. 여러 생을 거치는 동안 보살은 여러 가지 존재로 등장한다. 때에 따라 동물로 인간으로, 귀족으로, 평민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본생담’(Jātaka)은 이러한 붓다 전생(前生)의 다양한 삶에 관한 기록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붓다 전생의 삶을 단지 과거의 기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승 불교인들은 붓다의 전생에서의 삶을 지금 자신들이 현생에서 본받고 실천해야할 삶의 모범적인 예시라고 이해하였다. 그런 점에서 대승의 보살이란 붓다 전생의 영웅적 행위를 좇아 현생의 삶에서 모방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97호 / 2021년 8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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