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제75칙 자복원상(資福圓相)
허공에 원상을 그린다면 그대는 어찌하겠는가 고인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은 결국은 선원이나 조사의 선풍 일원상은 하나의 큰 동그라미 시작과 끝이 없는 일체를 상징
승이 길주의 자복여보 화상에게 물었다. “고인의 노래란 무엇입니까.” 자복은 원상을 그려보임으로써 그 질문에 응대하였다.
길주(吉州)의 자복여보(資福如寶) 선사는 위앙종의 제4세인 서탑광목(西塔光穆)의 법을 이었다. 선문답에는 음악과 관련한 주제가 더러 등장한다. 그 음악은 흔히 목소리를 통하여 뱉어내는 노랫가락 내지 악기를 통하여 연주해내는 음률이 주를 형성하고 있다. 고인의 노래는 고인의 가르침을 표현한 것이다. 노래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듯이 선지식의 훌륭한 가르침은 납자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이다. 그래서 고인의 노래에는 그에 상응하는 악기의 연주가 있고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흥이 있게 마련이다. 고인은 불특정의 인물을 상징하지만 수행과 깨침의 이치를 드러내준 역대의 조사를 가리킨다. 고인이 부르는 노래란 결국 선원의 가풍 내지 조사의 선풍에 해당한다.
때문에 여기에서 질문으로 제기된 고인의 노래는 자복여보 이전의 조사의 가르침이지만, 실은 자복여보 선사의 선풍이 무엇인가를 물어본 것이다. 자복여보는 고인의 노랫소리를 귀를 통해서 들어보려는 승에게 일침을 가하여 주의를 환기시켜준다. 그것은 바로 노래를 귀로만 들으려는 상식적인 도그마를 타파해주려는 것이다. 당연히 노래는 귀를 통해서 음향으로 전달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제일차적인 매개체의 수단에 불과하다. 노래를 언급하면서도 노래라는 개념에 빠져 있지 않으려면 눈을 통해서 그 노래를 들어야 하고 귀를 통해서 그 색을 볼 줄 아는 것이 고인의 가르침에 대한 제이차적인 이해의 범주에 속한다.
자복여보는 고인의 노래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일러줄 수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승의 질문에 대하여 단면적인 답변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곧 질문하는 승의 면전에다 똑똑하게 일원상을 그려서 이것이 바로 그대가 질문하고 있는 것에 대한 답변이라고 보여준다. 일원상은 하나의 동그라미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일체를 상징하면서도 항상 그 작용을 그치지 않는 영원한 깨침의 노래에 해당한다. 일원상을 땅에다 그려놓고 잘 보라고 일러주었든, 하얀 종이에 검은 먹물로 그려보여주었든,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까닭에 전혀 의심할 수가 없다. 고인의 노래라는 청각적인 의미가 이처럼 일원상이라는 형상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드러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치를 알아차리는 사람에게만 바로 그 찰나에 노래와 일원상은 동일한 차원의 공감각적인 교훈으로 다가온다. 아직까지 그 일원상이 무슨 의미를 드러낸 것인지, 그리고 자복여보가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행위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경우라면 질문과 문답은 영 어그러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자복여보가 그려놓은 일원상에 대하여 이제는 승이 어떤 제스처를 보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원상을 앞에 대하고도 눈만 껌벅껌벅하고 있는 경우라면 고인의 노래는커녕 고인이 누구인지, 또 노래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우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 대하여 장단을 맞추어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모습이지만, 그것이 이미 상식을 초월하여 심오한 문답으로 승화되지 않는 경우라면 승으로 하여금 재차 질문하도록 유도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원상에 대하여 모종의 반응을 보이는 납자라면 그것은 제법 선기가 익은 까닭에 서로 문답을 이어갈 수가 있다.
가령 일원상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일원상을 지워버린다든가, 일원상 안에다 어떤 부호 내지 글자를 써 넣어 보임으로써 자복여보의 일원상을 승 자신의 것으로 환치시켜 놓는다든가 하는 행위가 그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자복여보에게는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복여보는 일원상을 허공에다 그려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일원상 자체마저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런 경우에 승은 어찌 하겠는가. 승이 어떤 행위로 응수한다고 해도 결국 자기의 본전도 찾지 못하고 만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97호 / 2021년 8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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