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오정연 소설집 ‘단어가 내려온다’

“나는 일주일 후에 죽기로 했다” 안락사 선택한 ‘나’의 일주일 “내가 나일 때 죽겠다” 결심 환상같고 꿈 같은 인생에서 어느 순간이 나인 상태일까

2021-08-24     박사
‘단어가 내려온다’

얼마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임종의 순간이 가까웠을 때 불필요한 의료적 처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명을 미리 해두는 것이다. 판단이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지금 미리 판단해두는 것은 필요하다. 죽음은 외면하고 있을 때에야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죽음도 예의바른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올 것이다.  

안락사는 팽팽한 논란의 주제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면 언제 죽는 것이 가장 최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만약 판단한다면 기준은 무엇이 될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삶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며,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는 순간이 올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안락사가 시행된다면 죽음의 순간을 자기가 선택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애정으로, 신념으로, 두려움으로 혹은 전도몽상으로.

오정연 소설집 ‘단어가 내려온다’에 수록된 ‘마지막 로그’는 죽는 순간을 선택한 주인공의 일주일을 보여준다. 2078년의 가을. 안락사 기관인 ‘실버라이닝’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찾아가는 곳이다. 죽음의 방식뿐 아니라 일주일동안 라이프 리뷰, 대체현실 1시간 체험, 아카이빙 등의 부가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약물주사를 통한 조력자살방식’을 선택한다. 이곳에서는 요양원 시설도 운영되고 있는데, 안락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마음을 바꿔 죽음을 미루고 요양원으로 옮기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사실 시설에서는 죽음을 포기하기를 은근히 종용하기도 한다. 

소설 속의 ‘나’는 죽음을 결정하기에는 젊은 나이다. 그가 죽음을 결심하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당뇨망막병증이 발병한 탓이 크다. 실명은 피할 수 없다. 그는 온 세상이 까맣게 돌아서기 전에 ‘내가 나인 상태’로 인생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내가 나인 상태’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강인했던 어머니가 중증치매진단을 받은 뒤 점점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회상한다. “아직 인사도 건네지 못했는데 나를 기억하는,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이미 고아였다”고. 그는 자신 또한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그에게 죽음은 내가 나인 상태로 남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를 담당하여 일주일동안 도운 안드로이드 조이는 그에게 안락사를 취소하거나 연기하기를 권유하라는 중앙시스템의 지시를 받지만 실행하지 않는다. ‘나’가 예정대로 죽고 난 뒤 조이는 자신이 왜 안락사 재고를 권고하라는 중앙의 메시지를 무시했는지 설명한다. “맑은 마음으로 쌓아올린 결심을 충동적으로 되돌린 인간들이 주어진 시간을 견디며 어떻게 망가지는지 나는 보았다.”

사실 조이는 알고 있다. 생명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힘에 대해서. 그러나 조이는 덧붙인다. “그 과정에서 A17-13(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것이었다. 그는, 그리고 나는 그러지 않기를 원했다.”

다시 묻는다. ‘내가 나인 상태’라는 것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고. 그리고 삶을 살면서 우리는 알게 된다. 여전히 어떤 상황이든 ‘나’이기도 하다는 것을. 똥오줌 못 가리던 어린 시절의 나도 나이고, 마찬가지로 똥오줌 못 가리는 늙고 병든 나도 나이다. 불꽃 같고, 이슬 같고, 환상 같고, 꿈 같은 ‘나’이다. 그중 한 토막을 잘라내어 이것이야말로 내가 나인 상태이고, 병들거나 실명하거나 늙거나 정신이 혼미해지면 내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일까? 

현명한 판단에 의한 안락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나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죽음과 삶은 겹쳐있다는 것,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 삶은 그 자체가 충만한 기적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소설의 끝은 조금 다르게 쓰여지지 않았을까. 아니, 시작조차도.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98호 / 2021년 8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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