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심검당 살구꽃
마음 비우는 그 자리가 곧 부처 경내서 만난 포교사와 반가운 대화 다래헌 앞서 떨어지는 살구꽃 보니 노스님 법문 떠올라 마음 다잡게 돼 부처님 말씀과 법문이 인생의 길잡이
가을장마가 진다하더니 비가 온다.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서 밖으로 나선다. 봉은사 경내의 풀숲에서 풀벌레가 울고 아직 지지 않은 연꽃잎에도 젖은 가을빛이 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지 간에 계절은 제 할 일을 해야겠다고 뚜벅뚜벅 순환의 걸음을 걷고 있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만 얽히고설킨 세상살이에서 그리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예상보다 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고 백중기도 회향을 준비하는 모습들이 분주하다. 전각마다 걸음을 멈춰 문밖에 서서 반 배로 삼배를 드리며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굳게 닫힌 판전 문 앞에는 비둘기 한 마리와 참새 여러 마리가 모여있었다. 비둘기는 작은 포대에 담긴 쌀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 밑에서 참새들이 함께 먹자는 듯 비둘기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도 하고 포대 가까이 날아보기도 하지만 비둘기는 미동도 없이 열심히 포대를 쪼기만 했다. 비둘기와 참새는 누군가 닫힌 문 앞에 불심으로 올리고 간 쌀을 먹고 사니 복 받은 인연이다. 판전 안에 모셔진 화엄경, 금강경, 유마경 등 3480여 점의 경판의 내용도 익히고 날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절 안에 살면서 보고 듣는 것이 부처님 법과 말씀이니 사람처럼 말로 표현은 못 해도 그 수행의 깊이는 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참새와 비둘기의 모습을 사진으로 몇 컷을 담았다. 비둘기와 참새를 지켜보던 나처럼 나를 지켜본 듯 노 거사님 한 분이 말을 건네셨다. 절 입구에서부터 전각을 도는 동선이 같았던 거사님이다.
“한 컷 찍어줄까요? 아까 연꽃도 열심히 찍던데” “아∼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보니 포교사셨다. 마스크 때문에 몰라뵈었다고 말하자 봄에도 만났었다고 답을 하셨다. 신체적으로 남과 다른 개성이 있으니 나는 기억을 못 해도 상대는 기억하는 일이 많다.
포교사님과 다래헌 앞을 지나는데 배롱나무가 예쁘게 피었다. 포교사님은 배롱나무에게 꽃의 자리를 내주고 푸르게 서있는 살구나무도 봄에는 참 환하게 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셨다. 나 역시 그랬었다. 봄이 되면 봉은사 영각 옆 홍매화를 보기 위해 찾곤 했지만, 살구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작년 봄 영각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다래헌 앞 연분홍 꽃에 이끌려 가보니 살구꽃이었다. 바람결에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바라보니, 아주 오래전 봉은사 선지식 초청 일요법회에서 “마음을 쉬게 하고 비우면 그 마음과 그 자리가 곧 부처다”라는 선에 대해 법문 하시던 노스님이 떠오르기도 했었다.
언제나 찾아가면 우리 정서를 맑게 해주는 전통 사찰, 그 속에서 만나는 큰 스님의 법문은 바로 마음을 닦고 수행을 해야 함을 새기게 된다. 살구꽃을 보면서 노스님의 법문이 떠올라 마음을 다잡은 것처럼 일상사에서 부처님 말씀과 큰 스님 법문은 수시로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포교사님은 언제나 바른 수행을 해야 함을 강조하며 봉은사 일주문을 나가셨다.
내년 봄에도 살구꽃 활짝 핀 경내에서 노 포교사님의 수행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시 한편을 카톡으로 보내드렸다.
심검당 살구꽃
노스님이 심검당 댓돌에 앉아 넋 놓고 앉았더니
몇 해 피지 않았던 살구꽃이 환히 피었다.
대적광전의 잔잔하던 목탁 소리 그치고
사람들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간혹 바람이 불어 살구나무를 흔들어대고
해는 서산을 넘어간다 하고
대웅전 범자문 지붕 위로 낮달이 올라왔다.
땅거미를 부르고 어둠을 놓고 날아가는 저녁새는
심검당 노스님의 오도송을 물고 숲으로 들어갔다.
달빛은 밤 깊도록 부는 바람과 놀고 나서
누구를 향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배를 하였다.
스님은 어디 가셨는지 살구꽃만 져서
심검당 뜰이 온통 하얀데
바람은 꽃잎을 떨구고 어디로 갔나
꽃은 지는데 아무도 없다.
최명숙 보리수아래 대표 cmsook1009@naver.com
[1599호 / 2021년 9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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