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 관한 불교적 비전 (4): 보살, 이타(利他)로써 자리(自利)하는 삶
고통스런 경험이 누군가 치유할 잠재력되기도 유마 거사 “모든 존재들 병이 치유됐을 때 내 병도 치유돼” 자아 넘어 타자 아울러야 ‘무아’…아픔은 장애 아닌 촉매제 보살의 ‘능동적 참여’가 사회 실천 위한 이론 토대 이끌 핵심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대승보살의 결정적 중요성은 이타(利他)로써 자리(自利)하는 삶, 다른 이들을 치유함으로써 스스로 치유하는 삶의 등장이다. ‘바즈라드흐바자(Vajradhvaja)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살은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모든 고(苦)의 짐을 내가 짊어지겠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견뎌낼 것이다 … 그리고 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모든 존재의 짐들을 짊어져야 한다 … 나는 이 세상 만물을 생로병사 윤회의 공포로부터 구출해야만 한다. [‘Conze et. al. trans’, 1964, 131]”
이것은 단순히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다. 무아설은 불교 시작 때부터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왔는데, 무아를 일상적 삶에서 실천하고자하는 보살에게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란 단지 서구 전통에서의 ‘영혼’에 대비되는 실체적 ‘자아’의 부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아는 ‘나’와 ‘타자’에 대한 비이원론적인 관점을 포함한다. 그리고 무아는 자신의 존재가 자아의 영역을 넘어서, 타자의 영역을 포함하도록 확장됨을 역설한다. 타자란 보살에게 있어서는 자기 존재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다른 이들을 ‘우리’라고 아우른다. 그 ‘우리’는 ‘나’와 ‘너’ 뿐 아니라 ‘그들’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무아의 개념은 사회적 인식과 참여의 필요성을 향한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보살의 전형적 유형인 유마거사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아픔을 자기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프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의 병이 치유되었을 때, 나의 병도 치유되리라.”
이 이유로, 그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미루고 모든 다른 이가 구원될 때까지 윤회할 것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의 영적인 가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점과 사회가 개인 존재의 확장이라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실제로 유마거사는 다른 보살들에게 각자의 아픈 경험을 긍정적인 무엇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엇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보살은) 자신의 병을 통해, 다른 모든 아픈 이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셀 수 없는 전생의 고통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모든 존재들에게 도움과 이익을 주고자 염원하고, 깨끗한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슬퍼하거나 원통해 하지 말고 항상 노력하는 에너지를 일으켜야 한다. 그는 (모든 존재를 위한) 치유의 왕이 되어 갖가지 병을 치유해야 한다. [T475, 544c]
우리는 여기서 고(苦)의 경험이 다른 이를 치유하는 잠재력으로 전환되는 것을 본다. 아픔의 경험 없이는 다른 이를 치유할 수 없다. 이 점에 관하여 라울 번바움(Raoul Birnbaum) 프린스턴 대학 불교학 교수 또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보살에게 있어서 … 아픔의 경험은 장애의 요소가 아니라 촉매제이다. 그 촉매제의 궁극적 기능은 영적 작업에 새롭고 더 많이 헌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보살로 하여금 열반의 지복에 들어서 그의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모색하도록 하는 대신에, 아픔은 보살로 하여금 태생적으로 병의 고통을 나누고 있는 인류전체에 대한 본질적인 형제애를 생각하게 해주는 훌륭한 지렛대의 역할을 한다. 보살은 자신이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모든 존재들에게 도움과 구원이 되고자 더욱 더 굳게 결심하는 것이다.” [Birnbaum 1979, 14]
사실 진정한 보살은 아픔을 자청하고 적극적으로 환영하기도 한다. ‘바즈라드흐바자(Vajradhvaja)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인내심의 한계까지 나는 불행의 모든 단계들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고통이 존재하는 어느 계(界)에서 발견되는 것이건 … 나는 각각의 불행의 상태에서 셀 수 없는 영겁의 시간동안 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찾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의 상태의 모든 존재들이 자유롭도록 도울 것이다.” [Conze et al. trans. 1964, 131]
왜 보살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자 하는가? 어떻게 이것이 보살로 하여금 그들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보살 자신이, 깨닫도록 돕고 인도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자연스럽게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보살은 비로소 자신이 다른 사람과 둘이 아님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들의 아픔에 완전히 빠져드는 경험, 그럼으로써 그들과 자신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깨달음은 보살이 지혜와 자비를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지혜와 자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통의 원인을 보여줄 수 있는 자질이며, 마찬가지로 보살들이 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경험해야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한 자질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들은 분명히 사회 철학적 성격이라기보다 구원론적인, 종교적 성격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그는 무아설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모든 다른 존재들이 치유되도록 도와주어야만 자신이 치유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는 결국 ‘타인’의 고통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고통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의 발현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논의는 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구원론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불교적 비전의 사회정의에 관한 이론을 세울 수 있는 단초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아설에 관한 존재론적 관심을 사회철학적 관심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무아설은 불교적 비전의 사회정의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무아설은 공동체---작게는 마을 공동체로부터 크게는 지구공동체에 이르기까지---구성원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모든 종류의 고통은 ‘나만의’ 혹은 ‘너만의’ 고통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상정하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 법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롤즈의 이론상의 법률제정자들이 사회 내에서 잠재적으로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상상하도록 요구받듯이, 무아설은 “나는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임”을 요구한다. 이 관점의 사회적·실천적 함의는 크다. ‘그의 가난’이 ‘나의 가난’이 되고, ‘그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이타(利他)로써 자리(自利)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보살의 능동적 참여와 합쳐진다면, 불교적 관점의 사회적 실천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물론 완성된 불교적 사회정의론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이 글의 내용은 많이 부족하고 성글지만, 일종의 시론으로서 관심있는 불교인들을 위한 논의의 출발점을 마련한 정도는 될 것이라 믿는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99호 / 2021년 9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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