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보로딘의 현악 4중주
근면과 몰입으로 완성한 사랑의 선율 교수·군의관으로 성실히 강의·연구하며 휴일엔 작곡 매진 아픈 아내 위해 두 달만에 완성…섬세한 사랑의 표현 가득 어리석지만 굳은 신심으로 아라한 이룬 ‘출라판타카’ 닮아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마하판타카 존자가 그의 동생 출라판타카를 불러 “만일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출라판타카는 형 마하판타카의 권유로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는 현명하고 똑똑한 형에 비하여 머리가 좋지 못해 몇 달 동안 시 한 줄 외우지 못할 정도였다. 부처님을 만나고 깨달음의 세계를 알게 된 형 마하판타카는 동생에게도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싶어 그에게 출가를 권했지만, 무능함 때문에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점점 무시를 당하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다. 형에게서 환속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출라판타카는 너무 속상하여 정사 앞을 방황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마하판타카를 알아보고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출라판타카야, 실망하지 말아라. 너는 나를 의지하여 출가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에게 하얀 천을 내밀었다.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외우지 말고 이것으로 사람들의 신발을 닦아주는 일만 하거라.” 출라판타카는 그 천을 받아들고 출가자들의 신발을 닦아주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처님께 처음 받았던 천은 분명히 새하얀 색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때가 묻고 더러워져 새까만 색이 되자, 출라판타카의 마음은 요동쳤다. 4개월 동안 시 한 줄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우둔했던 그였지만, 하얀 천이 더러워지는 것을 보고 무상의 진리를 깨우친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고 하루하루 정진한 출라판타카의 결실이었다. 또한 부처님께서 근기에 맞게, 듣는 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개방적으로 설법하신 덕분이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출라판타카의 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출라판타카에게 하얀 천을 주며 ‘라조하라남(rahohara nam)’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외우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티끌을 제거하자’라는 뜻이다. 출라판타카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를 깨달아 아라한이 될 수 있었다.
원래 마하판타카와 출라판타카는 마가다국의 거부 장자의 딸과 그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신분의 차이가 있었기에 다른 지방을 옮겨 다니며 숨어서 살았다. 홀로 친정으로 가서 아이를 낳고 싶었던 장자의 딸은 고향으로 향하던 도중, 길에서 출산을 하고 말았다. 두 아이를 모두 길에서 낳은 그녀는 아이들에게 ‘길’이라는 뜻을 가진 ‘판타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큰 아이에게는 마하(큰)판타카, 작은 아이에게는 출라(작은)판타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출라판타카는 정성을 다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일에 전념하는 ‘작은 길(수행)’을 통해 모든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 스스로 깨우칠 수 있었다. ‘라조하라남’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출라판타카는 ‘몰입’할 수 있었고,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작은 핵심이었다. 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몰입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러시아의 민족주의 작곡가 알렉산더 보로딘(1833~1887)의 현악 4중주 2번을 들어보면 상당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다른 러시아 5인조(The Russian Five) 작곡가들처럼 그 역시 평일에는 본업에 충실했다. 군의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의학과 화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며 연구와 강의에 몰두했고, 스스로 ‘일요일의 작곡가(Sunday Musician)’라고 말할 만큼 주말과 휴일을 통해 작곡하는 집중력을 보였다. 그 덕에 다작은 불가능했고, 한 작품을 쓰는 데 몇 년씩 걸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작품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음악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내악 작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훌륭한 곡을 남기게 된다.
하이델베르크 유학 시절 만난 아내와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현악 4중주 2번’은 모두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악장에 걸쳐 길고 섬세하고 유려한 선율이 이어지는 작품으로 단순히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특유의 매력이 넘친다. 결혼 이후 줄곧 병상에 누워있던 아내를 위한 ‘변함없는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한 이 곡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단시간에 작곡되었다. 두 달만에 만들어진 이 작품을 많은 이들은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의 낭만적인 정서가 가득 담긴 1악장은 다른 작품들의 첫 악장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풍요로운 느낌을 준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다정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에너지는 보로딘과 아내의 첫 만남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악장은 조금은 발전된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왈츠풍의 악장이다.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진 마지막 악장 역시 끝까지 과장되지 않은, 부담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긴장감과 잔잔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이 곡의 핵심인 3악장은 가장 널리 알려진 악장으로 듣는이를 ‘몰입’하게 하는 악장이다. 형식적으로는 캐논 작법을 바탕으로 작곡되었으며, 저음부터 고음에 이르기까지 각 악기간의 균형있는 조합이 돋보인다. 실제로 보로딘은 이 악장에서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나타냈지만, 아름답게 묘사된 선율들은 온화한 에너지와 몰입감을 담고 있다.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의 결실인 이 악장은 녹턴(Nocturne, 밤의 정취를 담은 소품)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을 만큼 섬세하고 서정적이다.
필자에게 3악장은 출라판타카의 수행을 떠올리게 한다. 오로지 한가지 마음으로 집중하여 깨끗하게 티끌을 닦아낸 출라판타카의 수행과 3악장이 어딘가 비슷하지 않을까? 서정적이지만 과하지 않은 선율들의 반복이 수행의 과정처럼 느껴진다.
“지혜로운 이는 노력과 깨어있음, 절제와 단련으로 홍수가 휩쓸지 못하는 섬을 만들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출라판타카와 관련해서 설하신 ‘법구경’ 25번 게송의 내용이다. 부단한 노력과 출라판타카의 일화와 함께 보로딘의 현악 4중주 3악장을 차분하게 감상해 보자. 근면함, 마음가짐, 규율, 감각 조절을 통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했던 출라판타카의 수행의 과정을 떠올려보자.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99호 / 2021년 9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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