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지혜 ⑤

반야주는 공성 이해하는 수행단계 ‘반야바라밀다주’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번역 비평 있어 달라이라마, 공성 이해단계로 홍법대사는 수행 단계로 해석

2021-09-13     박희택

현장 스님의 ‘반야바라밀다주’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번역비평이 있다. 범본에 대한 문법적 분석을 통해, 반야바라밀다가 주문이 아니라 반야바라밀다의 상태에서 설해진 주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태승, 대·소본 반야심경의 비교를 통한 반야바라밀다주 고찰, 인도철학, 54, 2018)

학술적 고찰로 예리함을 보였다고 하겠으나, 현장 스님은 반야바라밀다의 상태에서 설해진 주문을 반야바라밀다주로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전문학이라는 표현도 있거니와, 경전의 번역을 또 하나의 경전문학으로 보면 반야바라밀다주로 표현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하겠다.

반야바라밀다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반야바라밀다로 지혜를 완성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법열(法悅), 즉 그 기쁨 그 환희 그 행복을 진언으로 노래한 것이다. 밀교가 보여 주듯이 심비(深秘)하고 구경적(究竟的)인 것은 진언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진언은 그 심비성을 다 해석할 수 없다고 하여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염송해야 한다는 견해가 강하다. 현장 스님의 오종불번(五種不飜)의 첫 번째인 비밀고(秘密故)가 그렇고, 밀교의 사종비석(四種秘釋) 중 심비석(深秘釋)의 밀호고(密號故)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에 조계종 표준 한글 반야심경에서도 반야바라밀다주를 번역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생활 속에서 반야심경을 보다 더 가까이 독송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글번역을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인도의 제바는 “간다! 간다! 저쪽으로 간다! 결정코 피안에 갔다! 도심(道心) 있는 중생이여!”로, 신라의 원측은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저 피안은 훌륭하도다! 각(覺)이 다 끝났도다!”로 번역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반야심경 항목 참조). 원측의 ‘끝났도다’는 ‘이루어졌도다’일 것이다. ‘사바하’는 ‘성취’ 내지 ‘원만’을 뜻한다.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하면 “가는 자여! 가는 자여! 피안으로 가는 자여! 피안으로 완전하게 가는 자여! 깨달음이여! 행복이 있어라!”가 되는데(김명우, 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민족사, 2010, 205쪽), 반야바라밀다의 개념에 유념하여 ‘깨달음이여! 행복이 있어라!’를 ‘큰 지혜를 깨쳐 행복하여라!’로 매만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여!’를 ‘이여!’로 바꾸어 문학성을 살렸다. ‘깨쳐’를 ‘깨달아’로 대체해도 무방하겠다.

(9) 반야바라밀다주에는 공성을 이해하는 수행의 단계가 담겨 있다. 달라이 라마가 최상의 소질을 지닌 수행자에게는 진언의 형태로 공성을 간결하게 설명한다고 한 것은, 반야심경의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는 반야바라밀다주에 관한 해설을 지칭한 것이다. 즉 반야바라밀다주를 통해 붓다의 경지로 이끄는 보살수행의 다섯 단계와 공성의 이해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밝혀 준다.

첫 번째 ‘아제’는 공덕을 쌓는 자량도(資糧道)의 단계로 들어가서 수행하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 ‘아제’는 공성을 깊이 지각할 수 있는 마음을 닦는 가행도(加行道)의 단계로 들어가서 수행하라는 의미이며, ‘바라아제’는 공성을 개념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깨닫는 견도(見道)의 단계로 들어가라는 의미이고, ‘바라승아제’는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서 공성에 지극히 익숙해진 수도(修道)의 단계에 들어가라는 의미이며, ‘모지 사바하’는 깨달음의 기반에 단단히 뿌리내려 무학도(無學道)의 단계에 들어가라는 의미라고 하였다.(주민황 역, 달라이 라마의 반야심경, 2003, 161~162쪽)

이와 같은 달라이 라마의 반야바라밀다주 해설은 일본 홍법대사 공해가 밀교적으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반야심경 비건(秘鍵)’에서 아제(성문진언)-아제(연각진언)-바라아제(대승진언)-바라승아제(밀교진언)-모지 사바하(궁극적 깨달음)로 이해한 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cf. 李居明, 密解 般若心經, 華齡出版社, 2010, 169쪽) 진언을 일심으로 염송하면 그침(고요, 止)과 살핌(통찰, 觀)이 동시에 일어나기에 필경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즈음 해서 반야심경의 지혜관 고찰을 마치고, 금강경의 즉비논리의 지혜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반야심경이 불교 철학적으로 공성을 깨우쳐 준다면, 금강경은 불교 논리적으로 공성을 깨우쳐 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즉비논리(卽非論理)이다. 4상의 공성을 대중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A는 A가 곧 아니기에(卽非) A이다’는 논리가 즉비논리이다. 즉비논리는 금강경에 모두 36차례나 나온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601호 / 2021년 9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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