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계 “광주시 가톨릭순례길 조성은 역사왜곡” 한목소리

불교학술단체장들이 보는 ‘가톨릭 순례길’의 문제점 “불교, 민족과 함께 호흡” 가톨릭 성지 고착화 우려 불교 역사 보존에 힘써야

2021-09-17     김내영 기자

경기도 광주시가 천주교 수원교구와 업무협약을 맺고 남한산성에서 천진암을 잇는 성지순례길 조성을 추진한다고 밝혀 불교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술단체장들도 “남한산성과 천진암의 역사적 배경과 가치를 외면하고 천주교 순교성지로만 부각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종단과 불교단체들이 불교 역사와 가치를 보존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법보신문은 9월16일 한국불교학회, 불교학연구회, 보조사상연구원, 한국선학회, 한국불교연구원, 대각사상연구원, 한국미술사연구소, 불교문예연구소 등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회 및 연구소 단체장들에게 광주시가 불교문화유산을 포함해 추진하는 가톨릭 순례길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천주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을 보호하려다 폐사에 이른 천진암. 천주교 수원교구 홈페이지 캡쳐.

먼저 고영섭(동국대) 한국불교학회장, 김방룡(충남대) 보조사상연구원장, 임승택(경북대) 불교학연구회장은 남한산성과 천진암을 가톨릭 성지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음을 명확히 했다. 특정 종교 선양을 위한 역사 해석과 사업 추진은 갈등만 낳는다는 것이다.

고영섭 한국불교학회장은 “스님들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며 산성을 축조하고, 성안에 사찰들을 조성해 나라를 지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며 “몇몇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했더라도 이를 그들의 성지로 주장하는 것은 역사 독점이자 불교사까지 빼앗으려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가톨릭의 제국주의적 발상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보다 지차제가 앞장서서 이 같은 일을 추진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며 “가톨릭 순교 이외에 그곳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순례길 조성에 앞서 선행돼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김방룡 보조사상연구원장은 “불교유산을 포함한 가톨릭 성지순례길 조성은 범성지화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공표하는 것”이라며 “지자체가 앞장서 시민 세금으로 종교편향적 순례길을 만든다는 것은 종교간 충돌을 부추기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불교는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여러 종교 중 하나일 수 있겠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온 가톨릭과 달리 우리 민족문화가 형성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민족의 종교”라고 설명했다.

임승택 불교학연구회장은 “역사적으로 천진암이 먼저 생겨났고 가톨릭 신자들이 피신처로 삼은 곳인데 천주교 성지가 돼버린 것은 상식적으로나 도의적으로 크게 어긋난다”며 “순례길을 만들기에 앞서 그곳의 배경과 역사를 정확히 알리는 것이 중요한데 단지 가톨릭 순교성지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 부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또 “모든 시민의 입장을 고려해야 할 지자체가 특정 종교를 노골적으로 대변해서는 안 되며 종교간에 서로 존중하고 화합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천주교 수원교구 홈페이지 캡쳐.

성지순례길 코스에는 불교계가 설립·운영한 나눔의집과 가톨릭과는 무관한 관광지들이 대거 포함시킨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자칫 명소들이 가진 본래 문화역사적 가치보다 가톨릭의 성지로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안성두(서울대) 한국불교연구원장은 “이번 광주시가 추진하는 순례길은 지나치게 가톨릭의 안목에서 시작됐다”며 “나눔의집과 천진암, 남한산성 등은 불교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임에도 불교 역사성은 외면한 채 ‘가톨릭 순례길’ 안에 끼워 넣은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안 원장은 이어 “근래 가톨릭계가 보여주는 배타적인 모습들은 다종교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라며 “다문화시대에서 가톨릭만을 위한 순례길이 어떻게 모든 시민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한국선학회장 정도 스님(동국대)은 “가톨릭 순례길에 광주시 역사문화유적지를 하위 개념으로 종속시키는 것은 불교계로서 상당히 불편하고 민감한 문제”라며 “가톨릭계만 소통해 사업을 진행할 것이 아니라 그 사업과 연결된 불교계를 비롯한 종교계와 단체들의 협력이 있을 때 화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교계 내부를 향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스님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남한산성과 ‘천주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을 보호하려다 폐사에 이른 천진암이 가톨릭 순교성지로 굳어지기까지 불교계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며 이번 사건을 뼈저린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다.

대각사상연구원장 보광 스님(동국대)은 “남한산성과 천진암은 불교적으로 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천주교 순교성지로만 인식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면서도 “다양한 불교유산이 산재해 있음에도 불교계가 미리 이를 선점하지 못한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명대(동국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 “천진암이 지금의 가톨릭 순교성지로 둔갑된 것도, 당당히 가톨릭 성지순례길 코스에 포함된 것도 불교계의 안일한 대처가 원인이 됐다”며 “불교의 역사성을 우리 스스로가 지키고 외호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전문가들을 발굴하고, 이같은 문제가 발생할 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차차석(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연구소장은 “잘못된 것을 외면하거나 묵인하는 것은 그 잘못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행위”라며 “불교계가 각계에서 진행되는 종교편향 행위를 지적하고 바로 잡는 것이 종교 갈등을 막고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김내영 기자 ny27@beopbo.com

[1602호 / 2021년 9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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