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슈만의 환상곡
내면에 혼재된 감정, 다채로운 선율로 승화 슈만의 작곡 활동 초기작 ‘환상곡’서 감정 변천사 읽을 수 있어 뮤즈 클라라를 향한 사랑, 좌절, 희열…베토벤 향한 존경심까지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인 순수한 열정은 지혜의 빛 ‘반야’와 닮아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작품들에는 그의 모든 열정과 꿈이 담겨 있다. 손가락 훈련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후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작곡가로서 성공하고자 했던 슈만은 작곡 활동 초기에 피아노 작품에 온 마음을 쏟았다. 1833년까지는 ‘아베크 변주곡 Op,1’, ‘토카타 Op.7’ 등 비르투오소(virtouso, 연주 기교가 탁월한 연주자)적인 곡들을 주로 썼고, 1838년까지는 피아노 소나타 3곡과 ‘환상곡 Op.17’등 규모가 큰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 중 ‘환상곡 Op.17’은 1836년부터 3년에 걸쳐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슈만의 대표적인 피아노 대작이며, 역사적으로도 슈만의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큰 작품이다. 1836년 당시 베토벤 사후 10년을 기념하여, 리스트를 중심으로 베토벤의 고향 본에 기념 동상 건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슈만은 평소에 베토벤을 가장 존경하였고, 또 리스트와의 교류도 있었기에 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의 제목은 슈만의 상상력이 가득 담긴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에 의한 대 소나타’였지만, 이후 수정 작업을 거쳐 ‘환상곡’으로 출판되었다.
‘환상곡’은 원래 특별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슈만은 베토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베토벤의 가장 대표적 업적인 ‘피아노 소나타’에서 볼 수 있는 3악장 구조를 택했다. 특히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에서 나타나는 형식적인 다양성을 각 악장에 담았다. 행진곡풍의 2악장은 베토벤의 소나타 Op.101에서, 느린 피날레 악장은 Op.109와 Op.111의 마지막 악장에서 그 영감을 얻었다.
또한 각 악장에 ‘폐허’, ‘승리’, ‘별의 관’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베토벤의 위대한 삶을 비유한 것이다. 첫 악장의 ‘멸망’은 청년 베토벤이 청력을 상실하고 낙심했던 순간을 나타내었고, 두 번째 악장인 ‘승리’는 시련을 극복하고 음악사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긴 그의 업적을 의미했다. 마지막 악장인 ‘별의 관’은 모든 역경과 절망을 딛고 승리한 베토벤의 위대한 삶을 관조적으로 표현했다. 이 상징적인 제목들은 최종적인 출판 단계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우리가 슈만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슈만 개인적으로는 스승 비크의 딸이었던 클라라와의 사랑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의 작품인 이 ‘환상곡’에는 각 악장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눌러 담았다. 특히 비크의 반대로 클라라와 만날 수 없었던 1936년에 작곡된 첫 악장은 연인에 대한 격렬한 사랑의 감정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슈만은 “이 곡은 내가 만든 곡 중 가장 열정적인 악장입니다. 당신을 향한 깊은 비탄의 노래입니다”라고 클라라에게 전했다.
또한 첫 악장의 마지막 부분인 코다(coda)에서 그가 존경하는 베토벤의 연가곡인 ‘멀리 있는 연인에게(An Die Ferne Geliebte)’의 마지막 곡 첫 선율을 인용하면서 베토벤에 대한 경의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원곡의 “당신에게 부르는 이 노래를 받아주오, 연인이여”라는 가사가 있는 부분을 인용하며 연인에 대한 사랑과 대선배에 대한 존경을 동시에 표현한 것은 슈만이 독특한 감성과 상상력을 지닌 예술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작곡가로서 활동하면서도 음악비평을 하고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집필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슈만은 C장조인 이 곡의 첫 시작을 G음으로 시작하며 선명하지 않은 화성감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함과 동시에 클라라를 상징하는 5도 하행 선율을 나타내어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떨어져 있는 아픔을 함께 표현했다. 또한 슈만의 극단적이고 솔직한 성격이 음악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1839년에 작곡된 두 번째 악장은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비크를 상대로 진행한 소송에 이겼을 무렵에 작곡되었다. 곡의 곳곳에 사랑을 쟁취한 슈만의 호방함이 강한 에너지로 표현되었다. 사랑을 얻고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며 자신감을 표현하는 듯하다. 특유의 붓점으로 변덕스럽고 난해한 리듬을 보여주는 악장은 클라라에 대한 순수한 집념과 희망을 담고 있다. 슈만의 강한 신념이 매력적으로 펼쳐진 악장이다.
마지막 악장은 시종일관 평화로운 분위기의 악장이다. 클라라에 대한 자기 구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악장으로도 평가된다. 클라라와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다짐을 담고 있는 마지막 악장은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 마지막 악장을 떠올리게 한다. 리스트는 1869년 이 작품을 헌정 받고 그의 제자에게 이 곡은 “시끄럽고 격렬한 것과는 전혀 반대로 지극히 몽상적인 것이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어쩌면 슈만에 대한 답례로 자신의 소나타를 슈만에게 헌정하며 오마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환상곡 Op.17’은 슈만의 뮤즈(muse, 음악의 여신)였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의 선물이었다. 무한한 매력과 시적인 상상력으로 가득찬 이 작품을 출판하고 이듬해 결혼했던 그들은 평생 음악의 동반자가 되었다. 슈만의 작품 중 가장 통일성을 갖춘 곡으로 평가되는 이 곡은 상당한 기교와 미적 감각이 필요하여 연주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의 악장, 슈만의 내적 감성을 모두 표현한 깊은 영혼의 소리를 표현해야 하는 작품이다.
슈만은 이 곡의 첫 페이지에 독일 낭만주의 문학가 슐레겔의 시를 적어 놓았다. “지상의 다채로운 소리 중에/ 조용하고 지속적인 단 하나의 음이 있으니/ 남 모르게 귀 기울이는 자에게만 들린다.” 필자는 여기서 ‘지속적인 단 하나의 음’을 ‘지혜의 빛’으로 생각해 보고 싶다. 작곡가 슈만에게 그 ‘지혜의 빛’은 ‘음악’ 그 자체이며, 순수한 사랑에 대한 표현, 오로지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는 자에게만 들리는 것이다.
부처님은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지혜를 빛에 비유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종류의 빛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달빛, 햇빛, 불빛, 지혜의 빛이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빛 가운데 지혜의 빛이 최상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지혜의 빛은 ‘반야(般若)’ 일 것이다. 필자는 늘 깨어있고 밝고 맑은 지혜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고 대상을 비추는, 어떤 곳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음악에 빗대어 보고 싶다. 슈만의 내면에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존재하던 단 하나의 힘’, 음악을 대하는 순수한 열정을 ‘지혜의 빛’으로 느껴 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603호 / 2021년 10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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