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탈종교시대와 불교 (3)

탈종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됐다 신과 사제 중심 종교문화, 인간과 수행으로 전환한 게 부처님 한 인물로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향해 해체하는 가르침 불교 특성은 ‘원심력’…유일신 종교의 성격 구심력과는 달라

2021-10-19     조성택 교수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탄생불, 금동탄생불입상(보물). 6세기 추정, 서울 호림박물관 소장. 사진출처=문화재청

탈종교와 관련한 지난 두 번의 연재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표하시고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글쓴이로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 소견이 우리 모두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는 것에 책임감도 느끼게 됩니다. 모쪼록 저의 제안들이 대중지성과 공론의 장을 통해 더욱 연마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글에서는 탈종교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불교의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탈종교’ ‘탈 중심’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사회는 바라문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사회였습니다. 신(神)중심의 세계관과 함께 카스트가 곧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던 사회였습니다. 바라문의 제사행위가 나의 안녕과 행복을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바라문적 세계관과 종교문화를 전적으로 전환하신분입니다. 이른바 문명사적 전환이었습니다. 부처님의 탄생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신(神)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인간이 세상의 중심임을 선언한 인본주의의 선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행복과 안녕은 바라문의 제사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수행에 달려있음을 선언하신 것이라 생각 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은 혈통으로 태어나는 ‘계급’이 아니라 각자의 행위에 의해 성취되는 ‘품성’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깨달음을 통해 윤회는 우주의 운행과 같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운행이요 마음의 동학(動學)임을 밝히셨습니다.

‘신(神)’이 아닌 ‘인간’, ‘제사’가 아닌 ‘수행’, ‘계급’이 아닌 ‘개인’, ‘우주적 원리로서의 윤회’가 아니라 ‘마음의 내적 동학으로서의 윤회’를 강조하신 점들은 문명사적 대전환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사회에서 제도로서 고착화되고 관습화된 종교였던 바라문교를 벗어나는 혁명적 전환이었습니다. 이는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탈종교’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출발에서부터 불교에 내재한 탈종교적 성격은 부처님 이래 오랜 불교전통에서 지속적으로 확인 되는 탈 중심적 성격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요컨대 유일신 중심의 종교가 구심력의 종교라면 불교는 원심력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유일신 중심의 종교가 ‘연대’와 ‘연결’ 그리고 신앙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은 교회와 사제를 향한 구심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슬람교의 메카(mecca)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의 예루살렘과 로마로 상징되는 지리적 중심은 곧 숭배의 대상이자 신앙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는 다릅니다. 2500년 불교사는 한 마디로 지속적인, 중심의 해체 그리고 원심력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의 깨달음으로 시작된 불교는 우리 모두의 불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왔으며 마침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심즉불(心卽佛)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의 방향은 ‘오직 부처님 한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부처가 되고자 하는 보살운동으로 나타났으며 나아가 모든 생명의 불성을 확인하는 운동으로 실천되었습니다. 경전의 역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설선설(佛說善說)의 불설관은 ‘모든 훌륭한 말씀이 다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는 선설불설(善說佛說)의 불설관으로 확장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불변수연(不變隨緣)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처 동아시아에 전래된 이래 불교는 이질적인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끊임없는 재해석의 과정을 겪어 왔습니다. 새뮤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1927~2008)이 언급한 ‘문명의 충돌’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과정에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인도 태생의 불교와 동아시아문명의 만남은 충돌이 아니라 동화와 수용 그리고 적응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마침내 선불교라는 불교의 또다른 한 송이 꽃을 피워낼 수 있었습니다. 선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불교가 오랜 역사동안 내재하고 있던 원심력을 유감없이 실천한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탈 경전을 넘어 당시까지 불교를 표현해오던 모든 언설과 그 언설의 역사조차도 해체해버렸습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 심즉불(心卽佛)은 기존의 불교라는 텍스트를 완전히 해체·부정하는 레토릭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선불교를 두고 ‘불교가 아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유일신을 중심으로 하는 구심력의 종교사에서는 끊임없는 이단 논쟁과 함께 때로는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충돌’의 역사이곤 했지만 불교사에서는 그러한 역사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불교는 원심력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심력의 종교는 자유로운 해석과 실천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 인연과 시절 인연에 따라 등장하는 다양한 변용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다양한 종파가 있지만 그것은 서양 개념의 ‘sect’(종파)가 아니라 일종의 학파(school)적 성격의 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조계종단 스님들 가운데 남방전통의 수행을 하시고 이를 재가자들에게 지도하시는 스님들이 있지만 종단차원이나 불교계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도 불교가 내재하고 있는 원심력적 특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심력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구심점을 향한 ‘오리지날’의 확인이 아니라 불변수연하는 가운데 유지해야할 핵심적 가치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불교의 근현대사에서 교단 간의 갈등이 있었고 또 지금에도 조계종단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지만 그 내용은 불교냐 아니냐의 시빗거리가 아니라 불교의 핵심가치에 대한 확인과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탈종교 시대의 대안으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지금, 불교의 핵심 가치가 무엇이냐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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