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형상과 소리를 좇지 말라

담마 알아가려는 노력이 붓다 만나는 지름길 “나의 형상·소리 말고 법 보라”고 설했음에도 붓다, 초인격화 육근, 번뇌 들어오는 문이자 혹하면 마라 영역 얽매이는 것 붓다 가르침, 경전·수행으로 접하거나 체득하는 수밖에 없어

2021-10-25     ​​​​​​​마성 스님
인도 마하슈트라 주 북서부 아잔따 석굴 내부 붓다의 모습. 붓다는 “형상이나 소리로 나를 보지 말라”고 강조했다.

세상 사람들은 형상을 통해 부처를 보려고 하고, 소리를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형상이나 소리로는 부처를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 나오는 유명한 사구게(四句偈)다. 불자들은 이 게송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형상이나 소리로 부처를 구한다. 이를테면 불상이나 불화[탱화]가 진짜 부처님이라고 믿고 그 부처님에게 소원을 빈다. 또 소리를 통해 부처를 만나려고 애쓴다. 불상이나 불화, 불교음악 등은 초보자들이 붓다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도록 마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상이나 불화 등은 초보자를 위한 방편법이다. 범부들은 이러한 방편법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신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의 본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한때 왁깔리(Vakkali)라는 비구가 중병에 걸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존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뜻을 붓다께 전달해 달라고 동료비구에게 부탁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붓다는 친히 병든 비구 왁깔리의 처소를 찾아갔다. 왁깔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예배드리려고 했다. 그러자 붓다는 “법을 보는 자는 나[붓다]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N Ⅲ, 120)라고 말하고, 왁깔리가 예배하려는 것을 그만두라고 만류했다. 붓다는 자신에게 예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붓다는 신격화되어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 왜 붓다는 형상이나 소리로 나를 보려고 하지 말라고 했는가? 인간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을 통해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대상[法]이라는 여섯 가지 외부대상[六境]과 접촉한다. 즉 육근을 통해 육경을 만남으로써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육근이 바로 번뇌가 들어오는 여섯 가지 문이기 때문에 붓다는 육근을 잘 단속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차팟사야따나-숫따(Chaphassāyata na-sutta(六觸處經)’(SN4:17)에서 붓다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六觸處]에 대해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마노의 대상인] 법이 되는 모든 것, 이러한 것은 세상의 무시무시한 미끼이니, 참으로 세상은 여기에 혹해 있네. 마음 챙기는 깨달은 자의 제자는, 이것을 멀리하여 건너가나니, 마라의 영역을 철저하게 넘어서서, 하늘의 태양처럼 아주 밝게 빛나도다”라고 했다. 형상이나 소리 등을 좇아가는 것은 마라의 영역에 얽매이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나사-숫따(Mānasa-sutta, 心意經)’(SN4:15)에 의하면 마라 빠삐만이 세존께 “허공에서 움직이는 올가미가 있나니, 움직이는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로다. 그것으로 그대를 묶어버리리니, 사문이여, 그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올가미는 몸만 묶지만 애욕의 올가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묶어버리는 힘을 가졌으며 여기에 묶인 자는 절대로 풀려날 수 없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윤회의 근본이 되는 갈애(渴愛, taṇh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이른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 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 有愛),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 無有愛) 등이다. 유애와 무유애는 사유의 대상을 향한 정신적인 반응으로서 견해(diṭṭhi, 見)와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위방가-숫따(Vibhanga-sutta(分別經)’(SN12:2)에서는 인식의 대상인 육경(六境),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대한 집착이 곧 갈애임을 강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六愛身]가 있나니 형상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법에 대한 갈애이다. 이를 일러 갈애라 한다.”(SN Ⅱ, 3, 42; DN Ⅲ, 244, 280)

형상[소리, 냄새, 맛, 감촉, 법]에 대한 갈애는 욕애, 유애, 무유애 세 가지가 있다. 이것을 모두 합치면 18가지가 된다. 이것은 안의(ajjhatta) 형상 등에 대해서 18가지가 되고, 밖의(bahiddha) 형상 등에 대해서 18가지가 되어 모두 36가지가 된다. 이것은 다시 과거의 것 36가지, 미래의 것 36가지, 현재의 것 36가지가 되어 모두 108가지가 된다. 이와 같이 108갈애[번뇌]는 육근을 통해 들어온다. 육근을 단속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 지수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즉 지적 지능지수(IQ), 감성 지능지수(EQ), 사회성 지능지수(SQ)가 그것이다. 지적 능력은 뛰어나지만 감성 지수 즉 미적 감수성에 따른 심미(審美) 지수가 낮은 사람이 있고, 감성 지수는 뛰어나지만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지성적인 인간형은 이성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비교적 냉정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하다. 반면 감성적인 인간형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다.

홍사성은 “부처님의 땅 인도로 가서 그분의 흔적을 찾아보고 숨결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정작 인도에 가면 불교가 없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고자 수많은 사찰을 찾아가지만 정작 절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경전을 통해 접하거나 수행을 통해 체득하는 수밖에 없다. 형상이나 소리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는 불교미술이나 불교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미술이나 음악을 통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형상이나 소리를 좇는 것은 권장할 일이 못된다. 형상이나 소리를 좇는 것은 마라의 속박에 엮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붓다의 담마[法]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곧 붓다를 만나는 지름길이다. 형상과 소리를 좇지 말라.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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