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돈오의 개념적 분석

돈오는 삼라만상 아우르는 근본적인 변화 선문서 돈오는 간화선·묵조선 등으로 단박에 불성 깨치는 것 성철 스님 이후로 돈오돈수 정설됐으나 돈오는 시간 필요해 돈오 이루려면 처음부터 닦을 것 없어야…있다면 돈오 아냐

2021-12-06     홍창성 교수
그림=허재경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문에서 돈오(頓悟)를 개념적으로 분석하겠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여길 것은 쉽사리 예상된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 부탁드린다. 특히 ‘불립문자’라는 멋진 표현과 ‘돈오’라는 근사한 단어를 사용하며 스스로의 입장을 펴나가면서 다른 주장에는 “입 다물어라!”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기에 그렇다. 게다가 불립문자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역설(逆說)에 빠진다.

(1)불립문자가 진리이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문자로 표현했으므로, 진리가 아니다.

(2)불립문자가 진리가 아니라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므로, 진리다.

불립문자가 진리면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면 진리다. 이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이발사의 역설과 같이 전형적인 패러독스의 예로서, 철학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 곤란해 한다.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할 의무가 있는 필자는 본고에서 돈오를 문자로 분석해 보려 한다. 영어권에서 ‘Sudden Enlightenment’로 번역하는 돈오는 점오(漸悟, Gradual Enlightenment)에 대비된다. ‘sudden’이라면 주로 시간적으로 짧은 기간을 의미하는데, ‘돈(頓)’은 그런 의미다. 그러나 한국불교계뿐만 아니라 영어권에서도 ‘돈(頓)’이 ‘갑자기, 단숨에’라는 뜻으로부터 더 나아가 ‘한꺼번에, 철저히, 포괄적으로’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돈(頓)’을 논리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한다.

‘돈(頓)’뿐만 아니라 ‘오(悟)’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우리말 ‘깨침’은 영어로는 ‘awakening’에 가깝지만, ‘enlightenment‘가 깨달음 일반을 지칭하는 표준 번역어로 자리 잡고 있다. 

나는 깨달음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면 깨달음에 관한 좀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붓다의 무상과 연기, 그리고 공의 진리를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을 나는 철학적 깨달음으로 간주한다. 이는 주로 인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나아가 인격수양과 참선수행을 통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열반적 깨달음에 이른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불성을 깨치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 이루는 선문의 깨침이 있다. 이 세 종류의 깨달음 각각에서 돈오가 가능한지를 살펴보겠다.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과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멸한다는 연기, 그리고 만물이 자성을 결여한다는 공을 단숨에 깨닫는 철학적 깨달음이 가능할까? 붓다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고등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이런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여 체득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런 돈오는 불가능하다. 누구나 공부 도중 ‘아하!’하고 느끼며 이치를 깨닫는 경험을 할 때가 있지만, 이런 경험은 스스로 깨달았다는 인식이 이루어진 시점이 그때라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준비 과정은 그 이전 오랜 기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연기와 공의 이치를 깨달아 철저히 체득한다면 우리가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적으로 변하게 된다. 불교의 철학적 깨달음은 신이나 영혼과 같이 아무런 조건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은 없으며, 이 세상 어느 사물도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하는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해 준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 가지고 있던 세계관의 내용과 정반대다. 철학적 깨달음은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이런 논리적 변화는 그 속성상 동시에 포괄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돈(頓)’이 가진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논리적 의미에서의 철학적 깨달음이 돈오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열반적 깨달음에서는 돈오가 가능할까. 우리는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안다.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열반적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는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런데 성철 스님 이후 한국불교계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돈오를 이루면 더 이상 닦을 것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만약 닦을 것이 남아 있다면 처음부터 돈오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돈오돈수는 기존의 돈오점수(頓悟漸修)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견해로 평가되지만, 나는 돈오돈수가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한다. 돈오돈수는 돈오에 돈수를 포함시켜 이해해야 가능한데, 이것은 원래 ‘돈오’가 가진 정의(定意)에 새로 돈수를 추가하는 설득적 정의(persuasive definition)의 오류(fallacy)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의를 바꾸어 자신의 논지를 관철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돈오돈수는 그 존재가 비(非)불교적이라고 비판받는 불성을 깨쳐야 가능하다는 문제도 안고 있다.

선문에서의 돈오는 간화선이나 묵조선 등을 통해 스스로의 불성을 깨치면 단박에 성도한다는 견해다. 진실로 불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깨치는 순간 깨침이 철저히 그리고 또 포괄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힌두교의 아뜨만과 같이 여겨지는 그런 비불교적인 불성이 과연 존재하느냐이다. 불성의 존재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이런 깨침을 순수하게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갑작스런 사건(event)으로 간주해야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행자는 수개월,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정진한다. 그런 정진이 쌓여 모든 것을 단박에 이루는 득도가 가능한 것이지, 아무 모인 조건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단숨에 성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고에서 세 가지 깨달음을 분류했는데, 이 가운데 철학적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즉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불교적 변화로 해석하는 경우만이 돈오에 해당된다.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은 철학적 이해와 참선수행 모두에서 점진적 과정이 필요하다. 생명체는 그렇게 단박에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문에서의 돈오는 그 전제로 받아들이는 불성의 존재 자체가 비불교적이라고 비판받는 상황이어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국 돈오란 연기와 공의 관점을 체득해 가지게 되는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사건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논리적 관점에서 한꺼번에 순간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포괄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돈오이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612호 / 2021년 12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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