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22편 화성 용주사 ‘감로도’ 및 안동 용담사 ‘감로도’ (끝)
도난 후 화기 훼손하고 가장자리 새로 배접 시대 변화 돋보이는 용주사 지장전 ‘감로도’, 1984년 도난 돼 조선 후기 특징 돋보이는 용담사 ‘감로도’도 같은 해 사라져 일반 서민 생활, 풍속 담긴 특유 형식으로 인기 높았던 불화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7-2 용주사 지장전에 봉안되었던 ‘감로도’가 1984년 3월1일 도난당했다. 이 불화는 2016년 10월에 서울의 한 개인 사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돼 38년만에 되돌아왔다.
화성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인 854년에 창건된 사찰로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원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완전 불타버린 것을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華山)으로 옮기면서 1790년에 용주사를 세우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시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는 도총섭이었던 보경 스님의 주도하에 4년만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하는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불상과 불화들이 여러 점 탄생했다.
회수된 용주사 ‘감로도(甘露圖)’는 도난된 후 화기 일부가 훼손되었고 잘려진 가장자리를 새로 배접하여 표구한 것이다(사진 1). 화면은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단에는 불, 보살을 배치하고 중, 하단에는 재를 위한 시식단과 의식 장면, 아귀(餓鬼) 등 육도 중생과 죄업을 짓고 죽은 자들의 생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단에는 7여래를 중심으로 그 왼쪽에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깃발을 든 인로왕보살이 내려오고 오른편에는 관음과 지장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양쪽 끝에는 커다란 원 속에 천도된 영가를 모신 벽련대를 이운하는 모습이 표현되었는데 벽련대 주위에는 천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오색 깃발을 휘날리며 일렬로 서있는 모습이다. 7여래는 시식의례 때 칭송하는 7명의 부처로 다보여래, 보승여래, 묘색신여래, 광박신여래, 이포외여래, 감로왕여래, 아미타여래를 말한다. 이와 같이 7여래가 강조되면서 화면 중앙을 차지하는 것은 18세기 이후 감로도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중단의 시식재 앞에는 승려들이 의식을 행하거나 승무를 추는 작법승, 송경승 이 절을 올리면서 수륙재(水陸齋)를 행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특히 하단에는 아귀(餓鬼)를 비롯한 지옥, 축생, 아수라, 인간, 천 등 육도(六道)의 세계와 인간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현실감있게 표현되었다. 아귀는 배고픔의 한 생인 아귀도에 빠진 존재다. 배고픔과 갈증으로 무엇이든 입에 넣기만 하면 불꽃으로 변하고 목구멍은 바늘처럼 가늘어 잘 넘길 수도 없어 몸이 바싹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형상으로 그려졌다.
용주사 ‘감로도’에서 아귀는 부리부리한 눈매와 근육질의 몸을 갖고 있는 신장상과 같은 모습이며 입에서 뿜는 불꽃이 아귀 전체를 감싸는 화염으로 바뀌는 등 도상적인 변화가 보인다(사진 2). 또 불교의 육도윤회 중 환난이나 지옥 장면은 거의 사라지고 성벽과 서당, 기생 등 시정풍속이 등장하는 것도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줄타는 장대패놀이와 사물놀이를 구경하는 일반 서민의 모습이나 주인이 노비의 머리채를 잡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장면,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싸우는 형상, 병을 치료받다 죽은 모습까지 묘사되어 마치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이런 풍속적인 소재는 18세기 후반의 감로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이 그림은 죽은 자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불, 보살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불교의식을 그린 것이다. ‘감로도’는 조선 16세기 이후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어머님의 고통을 없애고 구제하기 위해 천도재를 지냈다는 ‘우란분경’의 내용을 근거로 했다고 하여 ‘우란분경변상도’라도 한다. 사찰의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 주요 전각의 좌우측 벽에 마련된 하단 즉 영단(靈壇)에 주로 봉안되었다.
화기를 보면 1790년 9월 용주사에 봉안하기 위해 화사 상겸, 홍민, 성윤, 유홍에, 법성, 두정, 경파, 처흡, 처징, 월헌, 승윤 등 11명의 불화승이 감로도를 제작했다. 특히 상겸은 18세기 후반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용주사 대웅전의 후불탱화 제작에도 참여했던 불화승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 83 용담사(龍潭寺) 무량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감로도’도 1984년 8월21일에 도난되었으나 2016년 10월 회수하였다(사진 3). 용담사는 664년 신라 문무왕 때 승려 화엄이 창건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1574년에 혜증이 중건하여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을 보면 고려 문신 이규보와 김양경의 시에 용담사의 아름다운 정경을 읊은 내용이 담겨있다. 1784년에 간행된 ‘용와집’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 유승현이 1728년 가을 종질 및 동지들과 용담사를 방문하여 새로 지은 누대를 ‘황학(黃鶴)’이라 이름 지어주었는데 당나라 시인 최호의 ‘등황학루’에서 빌러온 것이라 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신증안동부여지지’ 불우조에도 용담사는 길안현 남쪽 15리 떨어진 황학산에 위치한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 후반까지 사찰이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작성된 재산대장에 의하면, 용담사에 소장된 문화재는 50건 191점인데 그중 불상 4점, 불화 26점이라고 한다. 특히 불화는 ‘관세음보살도’ 2점, ‘아미타불도’ 3점, ‘지장보살도’ 2점, ‘신장도’ 4점, ‘감로탱’ 1점, ‘독성도’ 1점, ‘산신도’ 4점, ‘진영’ 10점 등이 있었다.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당시 절의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회수된 용담사 ‘감로도’는 화기에 의해 1811년에 제작된 것으로 역시 화면 구성과 장면, 세부표현 등에서 조선 후기 감로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상단의 7불은 전면 가득 채움으로써 강조하고 있으나 개성없는 얼굴 표정에 정면관 위주의 평면화 등에서 형식화가 진행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감로도의 하단 장면이 확대되고 다양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소가 밭갈이 하는 농경 장면을 비롯하여 대장간, 주막거리와 같은 장터 풍경이 새로운 소재로서 표현되었다. 또 한량과 기녀, 연희집단, 유랑예능인 등과 같은 인물의 등장에서 조선 후기의 풍속화적인 요소가 보이며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장면이나 소나무, 바위의 표현기법 등에서는 민화적인 화풍이 나타나 있어 매우 흥미롭다.
‘감로도’는 3단 형식을 갖춘 복잡한 불교 도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천도재 중심으로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풍속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의 불화이다. 이 때문에 대중신앙적인 성향이 강한 조선시대 특유의 불화로서 인기가 높았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614호 / 2021년 12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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