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칠화에 법계도 그려 넣고 “강강술래”라 생떼
서소문 역사박물관의 초대형 나전칠화 주어사·법계도를 한국 가톨릭사로 소개 법계도 종착지는 태극기 위 예수십자가 서울대교구 추진…최기복 신부가 기획 “묵주로 강강술래 표현한 것”이라 강변 제정 스님 "주어사 천진암 사례 참담한 반복" 석길암 교수 "다종교 사회 종교 갈등 부추겨"
조선불교 중흥조인 보우 스님을 요승으로 폄훼한 문헌을 조선시대 불교의 대표 유물로 전시하고 있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화엄일승법계도’까지 가톨릭의 역사로 왜곡해 안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유적지 곳곳에 가톨릭 성지 간판을 세우며 조선왕조 500년의 공공 역사를 가톨릭 순교사로 독점한 것도 모자라, 불교계가 오랜 세월 전승하고 신성시하는 한국불교 대표 상징체계까지 한국 가톨릭을 돋보이게 하려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제2상설전시실에 한 벽을 가득 채우는 초대형 나전칠화(960㎝×300㎝)를 걸어뒀다. ‘일어나 비추어라’는 제목의 나전칠화는 순교정신을 담아 한국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형상화 것으로 안내되고 있다. 작품의 법계도는 작은 원들로 중간 중간에 여백을 줘 마치 가톨릭 묵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특히 법계도 끝에 십자가를 매달았으며 십자가 안으로는 예수로 추정되는 인물이 태극기 위에 군림해 서있는 듯 보이게 했다. 법계도 종착지에 십자가를 걸어둔 것이 논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2017년 바티칸 박물관 특별전 당시 십자가를 모호하게 표현했지만 서소문 칠화에서는 십자가가 선명해진 모양새다.
이 대형 칠화는 모두 3점으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비롯해 여주 옹청(청학)박물관과 로마 바티칸에 전시돼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가톨릭 교황 방한 당시 순교자 124위 시복을 기념해 최창화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과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을 주축으로 ‘시복 기념 작품제작 추진위원회’를 결성, 여주 옹천박물관장 최기복 신부가 기획해 김경자 한양대 명예교수의 지도아래 김의용 소목장, 강정조 나전장, 손대현 옻칠장이 1년 이상 공들여 제작했다고 전한다. 나전칠화는 제작 직후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지기도 했다.
최기복 신부는 2015년 10월 이 칠화를 처음 공개하는 자리에서 “(옹청박물관에 전시된 것과)같은 그림을 2개 더 제작해 한 점은 바티칸에 기증, 내년 9월 바티칸에 열릴 한국 특별전을 통해 해외에 소개하고 나머지 한 점은 서소문 성지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전칠화가 애초 기획 단계부터 바티칸의 ‘봉헌’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며 서울대교구와 협력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 작품은 2017년 9월11일부터 11월17일 70일간 바티칸박물관 브라치오 디 카를로 마뇨 홀에서 열린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한국 천주교회 230년 그리고 서울’의 주요 작품으로 소개됐다. 전시 뒤 한국 가톨릭계가 로마 교황청에 기증 의사를 밝혔고 그해 11월, 관계자 합의에 따라 2019년 10월 로마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온 신학생을 가르치는 우르바노대학 로비에 설치됐으며 현재도 전시되고 있다.
법보신문이 10월7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 문의하자 “그림 속 문양이 법계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며 “이 칠화는 2018년 청와대 사랑채에 전시한 뒤 기증받았을 뿐이다”고 답했다. ‘연합뉴스’(2015년 10월22일자)에 따르면 이 작품의 기획자인 최기복 신부는 법계도가 배치된 그림 오른편을 두고 “강강술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묵주를 중심으로 태극기와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도운 국가의 국기를 그려넣어 통일에 대한 염원과 함께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어 하늘에 올라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상징체계인 법계도를 버젓이 그려넣고도 법계도가 아니라 강강술래라는 것이다.
더구나 나전칠화 왼편에 그려진 여주 주어사(走魚寺)도 한국 가톨릭의 ‘과거’로 형상화돼 있어 이 작품에서 한국불교는 가톨릭의 순교정신을 선양하는 장식으로 전락하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장 제정 스님은 “이 땅의 불교계가 오랜 세월 전승하고 신성시하는 상징체계를 자신들의 순교정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도구로 이용한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라며 “더욱이 법계도를 강강술래라고 우기는 것은 이웃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린 행위로 주어사·천진암 사례의 참담한 반복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석길암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도 “이것은 다종교 공존사회에서 ‘종교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석 교수는 “불교의 진리를 표방하는 상징 체계를 가톨릭 교회가 마음대로 조작하고 그 끝에 십자가를 의도적으로 걸어둔 행태가 정말 ‘평화’를 외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향점인가 묻고 싶다”며 “법계도는 한국 불교가 벌써 천년 이상 수행과 신행의 대상으로 삼아온 것이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이런 왜곡을 한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52호 / 2022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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