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기자보다는 포교사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기룡 조계종 포교사단 전문운영위원 1973년부터 한국일보 사진 기자로 23년 간 근무…조선일보·뉴시스 거쳐 2011년 정년 퇴직 숨 고르려 잠깐 들린 강남 봉은사서 불연…2015년부터 포교사로 활동하며 틈틈이 재능기부 애정어린 관심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광주 가톨릭 순례길과 서울 광화문 광장 역사물길 제보
‘엇, 이건 분명히 남한산성인데….’
이기룡(해륜) 조계종 포교사단 전문운영위원은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광주시와 천주교수원교구가 “역사적인 명소 남한산성과 천진암 성지를 잇는 광주 순례길을 만들어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세계적 명소로 만들겠다”는 것. 위안부 역사관 ‘나눔의집’까지 가톨릭 성지 순례 코스로 들어가 있었다. 광주시장과 가톨릭 측 신부는 사진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쥔 채 환히 웃고 있었다. 이 포교사는 법보신문에 이 같은 내용을 전하며 사진과 기사를 보내왔다.
“남한산성 성곽을 사찰이 둘러싸고 있었죠. 이 사찰들은 법회 하기 위해 만든 절이 아닙니다. 스님들이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해가며 목숨 걸고 지켜낸 역사적 현장이죠. 이런 곳을 가톨릭 순례길로 만든다니요.”
이 제보를 계기로 법보신문은 광주 가톨릭 순례길 문제를 지속해서 비판했다. 불교계도 광주시에 꾸준히 문제를 제기 했다. 결국 광주시장이 조계종을 찾았고 총무원장스님에게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광주시는 가톨릭 순례길이 ‘편향’적 정책인 것을 인정하고 모든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공적인 관광 코스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서울시 성역화 논란의 발단이 된 광화문 광장 역사 물길의 ‘보우 스님 처벌’도 이 포교사의 제보로부터 비롯됐다. 불자로서의 애정어린 관심과 날카로운 시선이 빚어낸 성과이다.
그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걸까.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빈다. 열정과 비판 의식도 남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온 세월의 반을 기자(記者)로 보냈다.
그는 1973년 2월1일 한국일보에 출근했다. 그렇게 23년을 보냈고 조선일보와 뉴시스를 거쳐 2011년 2월 정년퇴직했다. 퇴직 무렵 개설한 블로그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불교계 소식이 올라온다. 그렇게 차곡차곡 담아낸 기록이 3400여건. 누적 방문객만 181만7500명이 넘는다(blog.naver.com/gainnal0171).
정작 기자로 근무할 땐 불교와 거리가 멀었다. 사실 “사찰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고 한다. 그가 기자생활을 하던 1980~90년대 조계종에서는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취재국에서 연락이 올 때면 불교계 관련 소식은 “이 기자, ○○사 싸움 났대, 빨리 가봐”로 시작됐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땐 왜 그렇게들 다퉜나 모르겠습니다. 당시 한국일보와 조계사 사이 높은 빌딩이 없었어요. 사무실에서 사찰이 훤히 보였습니다. 갈등이 많던 시절이었죠. 오늘날 종단을 보고 있으면 감회가 남다릅니다. 많이 안정화됐으니까요.”
곧이어 사진기자 시절 일화 하나를 전했다. 이 포교사의 한 선배가 ‘특종’이라며 어디서 “천진암대성당 100년 건설 계획”을 전했다. ‘100년 건설이라니.’ 한국천주교의 긴 안목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눈발 날리던 1987년 1월 천진암대성당 터 닦기 기공식에 선배와 함께 취재를 갔다. 거기서 생각했다. ‘내가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나이가 들면 신앙생활이 필요하겠지? 그땐 성당을 나가야지.’
하지만 퇴직 후 숨 고르기 위해 잠깐 들렀던 봉은사에서 불연을 맺었고 한참 뒤에야 대성당 터가 암자 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이로움은 이내 분심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급할 때 도와준 사람에겐 그래선 안 되죠. 천주학을 공부하던 이들을 숨겨주다 스님들도 처형당하고 암자는 터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대성당을 짓겠다니요. 거기다 불교색도 싹 지워버렸죠. 불상을 모셨던 법당 터에는 자기들 선조 다섯 명의 묘를 거룩하게 조성해뒀더군요.”
대분심(大忿心)은 그가 한 번 더 현장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됐다. 전법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원동력이 됐다. 2015년 포교사가 된 그는 “부처님과 스님들 법문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울지역 홍보담당’을 맡았다. 북한이주민이 국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 달에 한 번 하나원을 찾았고 불광사 탈북민 법회를 지원했다. 2017년까지는 봉은사보인 ‘판전’ 기자로 활동했고 2020년부터 시작된 ‘포교사단 20주년 백서 작업’에도 참여해 올해 3월 ‘포교단장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그런 그는 불연(佛緣)을 맺게한 강남 봉은사에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퇴직한 뒤 가장 큰 걱정은 ‘오늘은 또 뭐하지’였다. 40년간 바삐 출근하던 그가 일어나 갈 곳이 없었다. 아무리 등산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바둑도 장기도 둘 줄 몰랐다. 그 흔한 잡기(雜技) 하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된 게 고도원 아침편지’ 아마동(마라톤 동아리)였다. 마라톤은 제법 적성에 맞았다. 가기 싫으면 멈추면 됐고 기분이 내키면 더 가도 됐다. 오롯이 스스로 집중하는 시간이 좋았다. 메이저급 마라톤 대회 풀코스(42.195km)도 너댓번 뛰었다. 회원들과 성향도 잘 맞았다. 시각장애인을 돕는 모임을 자체적으로 만들었고 주로 봉은사 인근 잠실 종합운동장 건너편 탄천주차장에서 훈련 캠프를 열었다.
일정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고자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때 봉은사가 눈에 들어왔다. 일원동에서 광화문까지 출퇴근할 때마다 무심하게 스쳤던 그 장소였다. 몇 십년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절이 그날따라 왜 달리 다가왔을까. ‘한 번 들어가 보기나 하자.’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혼자 일주문에서부터 ‘쭈뼛쭈뼛’ 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합장 반배하더라고요. 대충 눈치 보고 흉내 냈습니다. 처음으로 초도 켜고 향도 피워봤어요. 근데 향 연기가 제 몸 한 바퀴를 휙하고 감싸더군요. 참 개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몸의 중심이 아래로 내려가듯 잔잔하고 편안해졌어요. ‘그동안 이 좋은 걸 왜 몰랐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죠.”
알게 모르게 허전했던 마음 한구석은 신심(信心)으로 그득해졌다. 봉은사 기초학당, 불교대학, 경전 아카데미 등 강좌를 차례로 들으며 차곡차곡 하루를 채웠다. 뜻밖에 찾아온 선물 같은 찰나였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도 이해하게 됐다. “느지막이 법을 만날 근기였나 보다”며 그는 볼웃음을 지었다.
“은퇴 후 10년을 부처님 가르침 없이 보냈다고 상상하면 끔찍합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충청도 시골 사람이 서울에 올라와 분에 넘치게 호사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77년을 살아낸 건 혼자만의 노력으론 안 되는 일이죠. 주위 인연들은 물론, 알게 모르게 받은 부처님 ‘가피’ 덕분입니다.”
그는 격동의 현대사를 알린 뛰어난 사진기자이기도 했다. 1982년 4월 경남 의령 총기난사 사건 현장을 찾아 일가족은 죽고 어린아이가 홀로 남아 제주(祭主)가 된 장면을 촬영해 보도사진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먼 훗날 자신을 “‘제법 괜찮았던 포교사’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행행본처 지지발처 삼계개고 수처작주’라는 글이 쓰여있다.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는 ‘가는 데마다 본래 자리요, 이르는 데마다 출발지’란 의미다. 신라 의상 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에 관한 해석을 모은 ‘법계도기총수록' 권상에 나온다. ‘삼계개고(三界皆苦)’는 욕계·색계·무색계가 괴로움에 빠져 있다는 뜻이고 ‘수처작주(隨處作主)’는 어떤 곳에 처하든 주인공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여기가 좋을까 저기가 좋을까 이리저리 빙빙 돌아봐도 결국은 그 자리라면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주인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게 하루 목표라는 이기룡 포교사는 은빛 머리칼과 형형한 눈빛으로 웃으며 말했다.
“불자라서 행복합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59호 / 2022년 1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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