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총섭과 왜란기 승군의 활동
자발적 ‘의승’에서 ‘승군’으로…전방위적 활약 조정, 폐지된 승과·법계 복구 우려 ‘판사’ 대신 ‘총섭’ 명명 승군으로 국가 군사체계 편입…전투 참여해 ‘군공’ 세워 “계율 폐하면 선풍 멈춰” 출가자 전투참여에 문제제기도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 서산대사 휴정 스님이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로부터 받은 직함이다.(편양언기, ‘청허당행장’ ; ‘정조실록’ 26권, 12년 7월5일) 조선 8도의 선교 양종 불교를 최고(都)로 총괄(摠)하는 지휘자(攝)라는 뜻이 담겨 있음은 알겠다. 그런데 왜 16종인 것일까?
비변사에서 아뢰었다. “지난번에 승군을 초적(抄籍·군적을 만드는 일)하여 임시로 쓰기로 했는데, (이를) 주관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팔도 각처의 선종과 교종에 각각 판사(判事) 1인씩을 임명하여 이 16인을 주관자로 삼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판사’라는 이름이 마치 선종과 교종을 설립하는 것 같아 후환이 없지 않을 듯하니, 그 명칭으로 성공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라면 총섭(摠攝)이란 호칭으로 각도마다 두 사람씩을 보내는 것이 무방할 것이라 합니다.”(‘선조실록’ 41권, 26년 8월7일)
‘선교도총섭’이라는 명칭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찍이 고려 공민왕 20년(1371)에 나옹혜근(1320∼13761) 스님이 ‘고려국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高麗國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脩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진 바 있고, 조선에서도 문종이 즉위년(1450)에 신미(?~?) 스님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密傳正法悲智雙運祐國利世圓融無礙慧覺尊者)’라는 존호를 내렸었다.(이색, ‘나옹화상탑명’ ; ‘문종실록’ 2권, 즉위년 7월16일)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법계 제도에 총섭이란 명칭은 없으며, 종단의 최고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공식적인 직위도 판사(判事)라 불렸다. 총섭이란 주로 ‘선교도총섭’이라는 단어의 조합으로 국사나 왕사 급의 존경을 받는 스님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존호였다.
그런데 이제 전쟁을 당하여 승군을 모집할 지휘 기관으로서 승직이 필요한데, 기존대로라면 그에 대한 명칭으로 ‘판사’라는 이름의 소환이 자연스럽지만 그 이름은 이미 폐지된 승과와 법계 제도의 복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하여 대신 ‘총섭’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 전국 16인의 총섭을 지휘하는 이가 바로 도총섭이 되었다. 교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양종 각 1인씩에게만 임명되는 판사의 직책을 8도 모두에 설치한다는 처음의 발상 자체가 판사 직위에 대한 오해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다시 총섭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게 된 경위에서도 ‘선교도총섭’이라는 명칭에 담겨 있던 스승의 이미지는 후퇴하고 실무적 취지가 부각되게 된 셈이다.
어쨌거나 이 일을 계기로 (도)총섭에는 승군의 지휘자라는 의미가 크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 당초 휴정 스님이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의 직함을 받은 계기도 스님의 승군 결성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기에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조 35년(1602)의 기록에 따르면 (도)총섭은 고신(告身) 즉 나라의 정식 임명장이 발급되는 직위였으며, 그 발급은 비변사에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155권, 35년 10월7일)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총섭의 임명은 지속되었고, 이는 곧 스님들이 승군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군사체계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에는 더 이상 양종도회소도, 도첩과 승과의 제도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국가는 총섭의 기구와 기능을 제도화함으로써 다시금 불교를 운영 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총섭제도로 관리되는 승군은 궁궐의 조영, 산성의 축조와 수비, 사고의 수호 및 국가의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
지난 번 글에서 “승군은 접전할 수는 없었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역(力役)을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을 의지하였다”(‘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 7월1일)는 ‘실록’의 내용을 확인했었다. “승장 유정은 의령에 주둔해 있으면서 근처에 보리를 파종하여 군량에 대비하였으며, 또 경상우도 총섭승 신열은 각 사찰의 위전(位田)에 보리 종자를 파종하였고, 가야산 해인사에서 궁전(弓箭)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어(‘선조실록’ 48권, 27년 2월20일), 과연 스님들의 활동이 전투 준비 및 지원 분야에서 대단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한양을 수복해 선조가 환도할 때 어가를 호위한 인원도 바로 휴정 스님이 직접 인솔한 100여명의 승군이었다.(이정구, ‘淸虛堂休靜大師碑銘’)
하지만 스님들의 활동은 결코 비전투에 국한되지 않았다. “도총섭 휴정이 보고한 군공(軍功)의 성책(成冊)에 의하면, 천우(天祐)는 3급(級)을 베고 일곱을 죽였으며, 일순(一諄)은 1급을 베고 여덟을 죽였다”(‘선조실록’ 40권, 26년 7월19일)거나 “(경상우도 총섭승) 신열이 이끄는 승군은 모두 장정들로서 경종(耕種)한 여가에 화포를 교습한다”(‘선조실록’ 48권, 27년 2월20일)는 비변사의 보고는 전쟁이 깊어지면서 스님들도 무기를 직접 들고 살상의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사실과, 또한 이러한 사실들이 도총섭을 통해 중앙 정부에 시시각각 보고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이러한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여 “선과(禪科)를 성급(成給·문서나 증서 따위를 작성하여 발급함)하여 용동(聳動·몸을 솟구쳐 뛰듯 움직임)의 방법으로 삼아 즉시 전쟁터로 달려가게 하자”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40권, 26년 7월19일.) 심지어 이러한 독전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군공을 세우고 환속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奮忠紓難錄’ 중 ‘乙未罷兵後備邊司啓’).
승단의 한편에서는 전쟁의 참화를 차마 두고만 볼 수 없어 참전하는 도반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출가자의 본분과 수행자의 풍모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휴정 스님의 또 다른 제자인 정관 일선(靜觀 一禪, 1533~1608) 스님이 “말법이 쇠하고 세상이 매우 혼란하여 백성이 안도하지 못하고 승려도 편안히 머물지 못한다. 적의 잔해와 사람의 노고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더욱 처감한 것은 승려가 속복을 입고 종군하여 죽고 도망치면서 출가의 뜻을 잊고 계율 실천을 폐하며 허명을 바라고 돌아오지 않으니 장차 선의 기풍이 멈추게 될 것.”이라고 하며 걱정하였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靜觀集’ 중 ‘上都大將年兄’ ; 김용태, ‘임진왜란 의승군 활동과 그 불교사적 의미’, ‘보조사상’ 37, 2012, 245쪽 재인용)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92호 / 2023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