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벽암각성(碧巖覺性)과 산성의 스님들
산성들 수축하고 주둔하며 수비까지 담당 임난 이후에도 남도총섭 벽암각성 등 수호스님 활약 빛나 호남 삼산성, 경기도 남한산성, 황해도 등 전국 산성 축성 18세기 산성 수호승 모집·관리 주체 총섭서 국가 직속으로
임진왜란 2년째인 1593년, 한양이 수복되고(‘선조실록’ 37권, 26년 4월21일)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조정에서는 산성(山城)의 전략적 가치와 활용에 대해 숙려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비변사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에서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외환이 그치지 않아 전쟁이 말할 수 없이 많았는데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산성의 이로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은 환란을 대비함에 이 일에 제일 관심이 깊었었는데 태평이 계속된 이후로는 전혀 축설하지 않았기 때문에…인민들마저도 몸을 숨길 곳이 없어 모두 적의 칼날에 죽게 하였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합니다.”
보고의 요지는 전라도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 순천의 건달산성(乾達山城), 강진의 수인산성(修仁山城), 정읍의 입암산성(笠巖山城)이 모두 천혜의 요새이니 수축을 완료해야 하는데, 민력(民力)이 고갈되었으므로 도내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역사를 마치자는 것이었다. 국가의 토목사업에 승역(僧役)이 동원되는 것은 조선 초부터 드물지 않게 이루어진 일이었으나, 특기할만한 것은 스님들이 이 산성들을 수축했을 뿐 아니라 이곳에 주둔하며 수비를 담당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인조 5년(1627) 전라도 무주에 적상산성(赤裳山城)이 수축되었다.(‘인조실록’ 16권, 5년 5월10일) 청나라의 흥기로 북방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평안도 묘향산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도 이곳으로 옮겨졌으며(‘인조실록’ 28권, 11년 1월23일), 조선 후기 금성산성, 입암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삼산성(三山城)으로 불리며 중시된 곳이었다.(‘효종실록’ 17권, 7년(1656) 11월26일, “本道山城有三, 赤裳也, 金城也, 笠巖也.”; ‘승정원일기’ 374책, 숙종 23년(1697) 11월6일, “湖南立巖·威鳳·金城三山城, 米合六萬餘石, 太四千石, 所屬列邑, 距山城二三日程.”) 그런데 인조 17년(1639) 이 적상산성을 수리하면서 “입암산성에 시행했던 옛 규례와 같이 승려 각성(覺性)에게 도총섭의 칭호를 주어 항상 성내에 거주하면서 일이 없을 때에는 수호하고 유사시에는 협수(協守)하게 하기”로 하였다.(‘인조실록’ 39권, 17년 10월8일)
기사에서 거론된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은 일찍이 인조 2년(1624) 세랍 50세의 나이로 봉은사 주지를 맡던 중, 조정의 남한산성 축조 요청에 따라 승도를 동원하여 3년 만에 완공하고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 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의발을 하사받은 교계의 지도자였다. 또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주석해 있던 전라도 화엄사로부터 의승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했으나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통탄 속에 회군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백곡처능, ‘大覺登階集’ 권2,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
이러한 스님에게 조정에서는 도총섭의 칭호와 함께 성내에 거주하면서 산성을 수호할 것을 명하며, 이것이 입암산성의 옛 규례에 따르는 것이라 한 것이다. 도총섭의 성내 거주라 하지만 이는 당연히 산성 수호 승도도 함께 거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조 18년(1640)의 기록에 따르면, 적상산성은 산세가 높고 가팔라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하므로 승도를 모집하여 들여보내 지키게 할 것과, 각성 스님을 전라도 총섭에 임명하고 인신(印信)을 지급하여 성 안에서 문도들을 통솔하며 함께 거주하게 할 것을 지시해 도총섭과 휘하 수호승들의 산성 거주를 명시하고 있다.(‘인조실록’ 40권, 18년 5월21일. 당초 의견을 제시한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는 각성 스님을 삼남 도총섭에 임명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전라도 총섭으로 인신에 표기하여 지키는 데 편리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가 입암산성의 옛 규례에 따르는 것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스님들의 산성 수호가 이미 입암산성이 수축‧관리되었던 임진왜란 당시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남도뿐 아니라 북방 지역에도 산성 수호승이 배치되었다. 황해도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8년(1628) 수양산성의 은적사(隱寂寺)에 총섭을 두고 승도를 모집하게 하였고(‘선조실록’ 184권, 38년 2월23일, “수양산성에 은적사가 있는데…본 고을의 승려를 소집하여 들어와 살게 하고, 능력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뽑아 총섭이라고 호칭하여 주관하게 하며 다수를 모집하도록 할 것을 현재 계획하고 있습니다.”), 평안도에서는 정묘호란의 와중에 능한산성에서 승군이 활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승정원일기’ 21책, 인조 6년(1628) 5월18일, “上曰 僧人⼊城云 果皆死於賊乎 忠信曰 其半出去 其在者 則僧軍皆先死云矣.”).
하지만 산성 수호승의 모집과 관리는 한동안 제도적으로 완비되지 못한 채 총섭의 개인적 역량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29년(1596) 비변사에서는 승군의 조직에 대해 건의하며 “이곳(삼각산 중흥동)에 별도로 하나의 진영을 설치하고 혹 사찰의 승도를 소집하되 응모하는 자에게 곧바로 면역(免役)의 도첩을 주게 되면 머지않아 원근의 승려들이 모여들 것이니, 이에 한 사람이 통솔하게 하여 화포 등의 기술을 연습하며 훈련을 통해 군(軍)을 이루게 하면…”이라 하여(‘선조실록’ 71권, 29년 1월28일), 비록 아직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때라고는 하나 산성 주둔 승려의 모집이 체계적 동원이 아니라 스님 개개인의 자의적인 지원과 총섭의 권한에 의지한 것임을 알게 한다. 그로부터 반 세기 가량이 지난 인조 18년(1640)에도 벽암각성 스님에게 적상산성의 수호를 맡기며 전라도 총섭의 인신(印信)을 지급했다는 것으로 보아 산성 수호 승도의 모집을 총섭 1인에게 위임했던 정황을 엿볼 수 있다.(‘인조실록’ 40권, 18년 5월21일)
하지만 상황은 산성 수호승의 모집 및 관리를 총섭에게 위임하는 방식에서 국가가 직접 관여하며 체계적으로 주도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모습은 숙종 40년(1714)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외방 사찰에 있는 승도의 다소를 조사하여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각기 의승을 350명씩 정하고, 액수를 정하여 차례로 번을 들게 하소서.” 지방 사찰의 승려 수를 조사하여 일정 인원을 차출하는 일이야 조선 초부터도 있었던 일이지만, 그들을 ‘승도’나 ‘승군’이 아니라 ‘의승’이라 부르며 심지어 차례로 번을 들게 즉 교대로 근무하게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불러들이는 의승의 교대 근무. 그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94호 / 2023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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