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17세기 법통의 성립과 불교상례집의 제작
유교 가부장적 위계 불교 내면화되며 법통 확립 출가·수계 개별 사찰서 이뤄지며 분절된 법통 회복 요구 비등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부터 정체성·계보 고민 본격 시작 휴정 말년제자 편양언기 주창한 ‘태고법통설’ 정식 법통 인정
17세기 후반 현종 재위기(1659~1674)에 있었던 두 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 1659년 기해예송, 1674년 갑인예송)은 왕실의 상례(喪禮)를 둘러싸고 벌어진 예법 관련 논쟁이었다. 현종의 부왕과 모후였던 효종과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현종의 할머니뻘 되는 인종 계비(繼妃) 장렬왕후가 명목상 아들과 며느리였던 이들을 위하여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소모적인 것으로 평가되곤 하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이 논쟁은 인조의 차남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던 효종에게 장자의 지위를 인정할 것인지가 핵심 의제였고, 이는 국왕에게 사대부와 다를 바 없는 종법(宗法)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국왕으로서의 특수성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사실상 군권과 신권 사이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논쟁은 17세기에 들어 부계(父系) 종법 위주의 친족 질서가 강화되고 유교적 가례(家禮)가 사대부들의 기본 의례로 확고히 정착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불교계에서도 나암진일(懶庵眞一)의 ‘석문가례초(釋門家禮抄)’(1631), 벽암각성(碧巖覺性)의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1636), 허백명조(虛白明照)의 ‘승가예의문(僧家禮儀文)’(1670) 등 상례집(喪禮集)이 17세기 동안 연달아 편찬되었다. 그리고 이들 불교 상례집에 나타난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부계 중심의 상제(喪制)인 오복제(五服制)의 수용이었다.
오복제는 친족이 상을 당했을 때 돌아가신 분과 자신의 관계에 따라 상복의 형태와 상복을 입는 기간에 차등을 두는 규정이다. 상복의 종류와 기간은 참최(斬衰: 3년), 자최(齊衰: 1년), 대공(大功: 9개월), 소공(小功: 5개월), 시마(緦麻: 3개월) 5가지로 나뉜다.
실제로 ‘석문가례초’와 ‘석문상의초’에는 책의 첫머리에 각각 ‘승속오복도(僧俗五服圖)’와 ‘승오복도(僧五服圖)’가 실려 있는데, 이는 세속의 친족과 승단의 인연 있는 스님들에 대하여 제각기 취해야 할 상복의 종류를 아울러 도시(圖示)한 것이다. 가령 ‘석문가례초’ ‘승속오복도’의 경우를 보면 승단의 수업사(受業師), 교육사(養育師), 수계사(受戒師)는 세속의 부모와 같이 3년의 참최를 하고, 증계사(證戒師)는 조부모와 같이 1년의 자최를 하며, 조사(祖師), 어산사(魚山師), 사백(師伯)과 사숙(師叔)[僧伯叔], 친법손(親法孫)은 속가의 백부‧숙부와 같이 9개월의 대공을 하게 되어 있다. ‘승가예의문’에도 책의 말미에 같은 방식으로 ‘승상복도(僧喪服圖)’가 실려 있다. 심지어 ‘석문가례초’에는 ‘승속오복도’ 밑으로 ‘본종오복지도(本宗五服之圖)’와 ‘본종오복촌수도(本宗五服寸數圖)’도 함께 실어 세속 친족의 오복제 적용 기준과 촌수를 자세히 소개하기까지 하고 있다.
물론 이 세 권의 상례집 모두 본문에서는 불교 상례의 세부 절차와 방식, 참석 인원 등이 정리되고 있지만, 하나같이 유교의 상복을 승단에 적용시킨 도해(圖解)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 이들 불교 상례집의 큰 특징이 바로 유교식 오복제의 수용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실제로 ‘석문가례초’에 발문(跋文)을 쓴 매곡경일(梅谷敬一)도 “주문공(朱文公: 주자)이 펴낸 속례(주자가례)를 얻어서 그에 근거해 불교 의례집에 빠져있는 내용의 요점을 취하였다”고 하여,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승속오복도’와 ‘승오복도’ ‘승상복도’에서 확인되는 오복제의 수용은 단순히 상복의 종류와 기간에 관한 제도의 수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섯 종류의 상복을 구분하여 착용하게 하는 친족관계의 정리, 즉 부계 위주의 종법 또한 불교계에 적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즉 세속에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백부‧숙부와 자식이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따라 펼쳐져 있듯, 승단에도 그에 준하는 위계질서가 가부장적 방식으로 재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단 내에 자리 잡게 된 이러한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대한 불교 자체의 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조선의 불교는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부터 자신들의 정체성과 계보에 대해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도첩과 승과로 대표되었던 조선 전기의 승정제도가 16세기에 무너진 것, 그리고 임진왜란 시기 청허휴정(淸虛休靜) 스님을 구심으로 하여 전국의 스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위난 극복에 앞장서며 국가와 사회로부터 존경의 시선을 받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조선 전기에는 국가의 관리하에 출가 사찰과 소속 종파의 법맥이 자연스럽게 확인되었지만, 공식적인 승정 체제가 무너진 이후에는 출가와 수계(授戒)가 개별 사찰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분절되고 잊혀진 법통과 계보를 회복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요구가 비등했던 것이다.
이에 휴정의 제자로서 왜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워 이름이 높았던 사명유정(四溟惟政)이 입적한 뒤 그 문도들에 의해 조선불교의 법맥을 고려 말 나옹혜근(懶翁惠勤)에게 구하는 ‘나옹법통설’이 주창되었다. 그러나 사명 문도에게 의뢰를 받고 그 취지를 비문으로 쓴 허균(許筠)이 역모죄로 처형당하자, 휴정의 말년제자인 편양언기(太古普愚)가 다시금 스승을 선양하며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로부터 법맥을 잇는 ‘태고법통설’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이 ‘태고법통설’이 정식 법통으로 인정됨에 따라 태고보우-환암혼수(幻庵混修)-구곡각운(龜谷覺雲)-벽계정심(碧溪正心)-벽송지엄(碧松智儼)-부용영관(芙蓉靈觀)-청허휴정으로 이어지는 전등의 계보가 확고하게 자리 잡으며 오늘날까지 받아들여지는 조선불교의 공식 법통이 되었다.
17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이러한 조선불교의 법통 확립은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도통론(道統論)’과 맥을 같이 하고 한편으로는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강화된 ‘화이론(華夷論)’의 중화 정통주의와 조응하며, 유교의 강력한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불교 안으로 내면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계 위주의 종법과 가례를 근간으로 하는 오복제가 17세기에 제작된 불교 상례집에 수용된 것 또한 그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 본문의 내용과 인용은 김용태의 ‘조선후기 문파의 형성과 불교 상례 정비의 의의: 부휴계의 ‘석문상의초’와 ‘석문가례초’를 중심으로’(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편, ‘한국 호국불교의 재조명 10, 2021)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언급된 불교 상례집의 내용은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700호 / 2023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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