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군에 부처님 법음 울려퍼지길 서원했습니다”
정영옥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장 직장 친구 출가로 불연 시작 어린이 찬불가 지도자로 활동 타지역 불교대학서 수학하며 영동불교대학 필요성 느껴 회의 느끼고 좌절한 순간 있지만 도반·위빠사나 수행으로 이겨내 불교회관 건립 발원 10년만에 성취 전 세대 포교·요양원 마지막 목표
“영동군 불심을 결집할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영동군 불자들의 소통공간이자 봉사와 교육의 거점이 될 ‘불교회관을 건립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뜻을 함께하는 30여 명의 도반들과 영동 호국관음사에서 금요기도를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황룡사 주지 종림 스님과 함께 ‘영동생활불교실천대학’을 개설했다. 간절한 기도는 10년간 이어졌고 지난해 7월,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관’이 건립됐다.
지역 불교발전, 포교, 봉사에 진력하고 있는 정영옥(65·도안신)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장이 처음부터 신심깊은 불자였던 것은 아니다.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으로 통학을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상업고를 졸업하고 곧장 취업해 일을 시작했다. 직장에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는 삶에 회의를 느낀다는 말을 자주했다. 결국 반복되는 일상에 지쳤다며 어느 날 출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제주도로 떠났다. 몇 달 뒤 적응하지 못했다며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충북 영동의 영국사로 출가하겠다며 떠났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친구가 방황하는 듯 보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함께 영동으로 따라가 피아노 학원을 열었다. 출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친구의 심정을 헤아릴 순 없었지만, 삶에 지치고 혼란스러워하는 친구가 걱정됐다. 학원을 운영하며 친구의 출가를 격려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불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친구를 따라온 것이지만, 절에 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해졌다. 친구가 영동을 떠난 후엔, 스스로 시내에 있는 금성사라는 절에 다녔다. 금성사에는 어린이 법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피아노를 칠 수 있어 어린이 찬불가 교육을 담당했다. 음악을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가사의 뜻을 모르니 아이들이 물어볼 때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책을 찾아보며 불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나의 마음을 닦는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스스로 믿고 부처가 된다는 것에 정말 올바른 종교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부처님이 되는 것은 힘들겠지만 닮아가는 사람이라도 돼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는데, 돌이켜보니 그게 나의 초발심이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고 영동을 떠나 경기도 부천에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도 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던 중, 외환위기가 찾아와 직장을 잃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부천에서의 생계유지가 어렵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마음의 평온을 얻고 지냈던 영동이 떠올랐다. 영동으로 돌아와 부처님께 기도하며 위로를 얻고자 했다. 당시 영동에는 사암연합회만 있고 신도회가 없었다. 혼자만의 수행도 좋지만, 공동체로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사암연합회의 문을 두드렸다.
사암연합회장 혜정 스님에게 신도연합회를 구성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스님은 흔쾌히 함께 만들어보자며 신도회 총무를 부탁했다. 그렇게 영동에 있는 사찰을 돌며 영동군 불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앞서갔던 마음과 달리 신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독학했던 불교공부의 부족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가장 가까웠던 무주 안국사의 불교대학을 찾아 1년간 수학하고 졸업을 했다.
“당시 안국사 불교대학은 종단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었어요. 졸업을 해도 포교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고 오가는 일이 번거롭기도 했죠. 그때 영동군에 불교대학을 만들면 내가 공부하기에도 좋고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불교대학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조차 몰라 무작정 스님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서울 포교원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부단한 노력 끝에 불교대학의 문을 열고 정식으로 학생을 모집했다. 영동의 미약했던 불심을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70여 명의 1기 학생이 모였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불교대학에서 교실을 청소하고 수업을 준비했다. 각종 서류도 직접 작성하는 등 불교대학의 전반적인 업무를 도맡아 했다. 너무나 바쁘고 고된 일상에 공부를 병행할수 없었지만, 영동군에 부처님의 법음이 퍼지고 있음에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8기 학생들의 졸업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학교를 혼자 주도한다”는 지적과 “신도를 빼간다”는 스님들의 견제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실망과 회의가 밀려왔지만 인연인걸 어쩌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영동불교 중흥에 대한 간절함을 알아준 졸업생 30여 명이 그를 따라나섰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믿고 따라와준 도반들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미얀마 명상원에서 15일간의 위빠사나 수행으로 마음을 다 잡고 한국에 돌아와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관 건립’을 발원하는 금요기도회를 시작했다. 1년여 만에 황룡사 주지 종림 스님을 학장으로 영동군생활불교실천대학을 개설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들어 실천하겠다는 뜻을 담아 생활불교실천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1기 입학생 50명을 시작으로 매년 졸업생과 연합포교사를 배출했고 이를 토대로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도 결성했다. 회원들과 연꽃봉사단을 꾸려 매주 소외이웃을 위한 반찬나눔 봉사를 진행했고 매달 무료급식소를 운영해왔다. 자비실천재가노인복지센터장을 역임하며 봉사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불교를 위해 명상과 다도 등 다양한 강좌도 개설했다. 불교의 차문화를 알리고자 원광사이버대 차문화경영학을 공부하고 ‘영동차사랑회’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영동군과 함께 ‘별빛찻자리’라는 행사를 기획해 지역주민들에게 차문화를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그렇게 십시일반으로 10년 동안 영동불자들과 함께 원력을 모아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관 건립발원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 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 있음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고통은 욕심에서 비롯됐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려놓음에 있다는 가르침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 내려놓고 베푸는 삶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회향하고 있습니다.”
필요없는 인연은 오지 않는다는 가르침처럼 힘들었던 시간을 돌이켜보니 수행과 배움의 스승과도 같았다. 이론의 배움을 넘어 함께 수행하고 회향하는 것이 불교임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힘들었던 순간도 이겨낼 수 있게 함께 해준 도반들의 귀중함도 깨달았다.
신도회장 임기는 올해로 마치게 되지만 전법의 의지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청년전법을 위해 군법당 위문법회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휴식을 위해 찾아오는 군인들에게 불심을 심어주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또 어린이 법회에서 찬불가를 가르치며 환희심을 느끼던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현재의 불교회관을 중창해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젊은 세대에게 불교를 전하는 게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포교가 이루어지도록 작은 힘이라도 꾸준히 보태려합니다.”
그의 마지막 목표는 ‘불자 실버타운’이다. “지금까지 봉사자로 활동해온 1기 회원들을 포함해 영동불자의 평균연령이 굉장히 높다. 그들이 공동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삶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할 수 있는 실버타운만 만든다면 그 동안의 활동을 원만히 회향하는 일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영동군에 부처님 법음을 펼치겠다는 원력 하나로 한 길을 이어온 그의 걸음은 오늘도 계속된다.
유화석 기자 fossil@beopbo.com
[1733호 / 2024년 6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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